“함께 온 사람과 더 끈끈해 질 테니 꼭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어둠 속으로 들어가던 길, 이빛나(28)씨가 연인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전시장 ‘어둠 속의 대화’에서다.

▲평일 오전부터 전시 <어둠 속의 대화>를 찾은 관람객들이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완전한 어둠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익숙한 장소를 낯설게 만든다. 참가자들은 잠시라도 떨어지면 “어디 있냐”며 일행을 찾는다. 뒷사람이 등에 와 부딪혀도 웃으며 속도를 맞춘다. 서로를 배려하다보면 어색했던 어둠이 이내 친근해 진다.

평소에 쓰지 않던 감각들은 다른 사람을 인지하는 도구가 된다. 청각으로 상대의 성격과 기분을 파악하고 체취와 촉감으로 주변인을 구분할 때쯤 환경도 바뀌어 있다. 그 때마다 조심스런 발끝걸음과는 반대로, 한 손과 지팡이는 분주히 움직여 주변을 파악해야 한다.

“시각장애인들은 무섭고 답답할 것 같아요. 안보이면 불편하니까요.” 여중생 한 명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전시장을 찾은 이들의 후기는 대체로 비슷했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이 씨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은 도움 주는 이조차 없으면 너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김태인(28)씨는 시각 장애를 갖게 된 자신을 상상하며 “내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볼 수 없다면 여자로선 끔찍한 일”이라고 얘기했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자 전시장을 찾았다는 이미라(44)씨도 실제로 장애를 갖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으니 슬플 것 같다”고 했다.

이렇듯 비장애인은 ‘못 보는 눈’ 자체를 불편함으로 여긴다. 그러나 장애인은 장애 그 자체보다는 대인관계 등 사회적 존재로서 느끼는 어려움을 가장 큰 불편으로 꼽았다.

서울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의 4번 출구로 나오면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건물이 보인다. 엘리베이터로 6층에 내리자 사무실이 보였다. 이곳에서 만난 시각장애 1급 천상미(42)씨는 보행 시 지팡이나 동료의 안내가 필요하다.

그를 정말 힘들게 만드는 점은 스스로를 ‘을’로 느끼게 하는 사회적 환경이다. 천 씨는 자신과 같이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전맹(全盲) 시각장애인은 이동할 때 도움이 필요하니 불만이 있어도 토로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러다보니 욕구를 억제하는 게 습관화 된다고 덧붙였다.

자신은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소외감을 느낀 적도 있다. “저기 좀 봐! 진짜 웃긴다.” “어제 그 드라마 봤어?” 친구들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사이, 천 씨 마음에는 답답함이 번진다. “매번 뭔데, 뭔데 라고 물어보기 어렵고 자존심 상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최정근(37)씨는 약시(弱視)다. 선천적 시각 장애가 있었지만 수술 끝에 시력이 조금 나아졌다. “저는 기자님 얼굴형이 보여요. 눈썹과 눈의 위치는 보이는데 눈동자가 전체가 까매요.” 그는 미간을 좁힌 채 1m 남짓인 거리에서 마주보며 말했다. 전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하지 못했으니 그래도 나아진 셈이라고 얘기했다.

사물이 조금 보여서 불편한 점도 있다. 최 씨에 따르면, 시력이 남아 있는 저시력 환자는 어떻게든 눈으로 보려고 한다. 식료품을 살 때 병 음료 하나도 눈 가까이로 가져와 요리조리 뜯어본다. 이 때 주변의 시선이 가장 신경 쓰인다. “아예 안 보일 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보이거든요.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을 수도 있는데 괜히 제가 불편한 거죠.”

“눈이 보일 땐 후딱후딱 준비해서 슉 전철 타고가면 시간은 금방금방 맞출 수 있었죠.” 안우경(38)씨는 장애를 갖기 전에 ‘빨리빨리’ 한국인의 전형이었다. 30분이면 충분하던 준비 시간. 하지만 지금은 2시간이 더 필요하다. 서울시에만 424대가 있다는 장애인용 콜택시는 기본요금 1500원으로 비용은 저렴하지만 오래 기다려야 한다. 그는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고 했다.

정동훈(35, 가명)씨는 점자블록을 따라갈 때 불편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지하철 1호선 부평역에서 2호선 신도림역을 거치는 출근길. 점자블록 위에 물건을 놓은 승객이 적지 않아서다. 그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점자블록과 같은 장애인용 시설에 대한 배려는 아직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평일 출근 시간대인 오전 9시 신도림역, 점자블록 인근에 물건을 펴놓고 파는 지하철 상인의 모습

조현영(37)씨는 외모에 관심이 많다. 19세에 장애 판정을 받고, 색깔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주변 사람 시선이 신경 쓰인다. 외출복을 고를 때와 화장 할 때가 가장 답답하다. 외출 준비를 끝내고 나면 활동 보조인에게 확인한다. “이상해 보이진 않나요?” 국가에서 보조해주는 활동 보조인은 그에게 신체 밖의 눈이 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14 장애인 실태 조사’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10명 중 9명은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그 중에서도 질환에 의한 시각장애가 53.6%로 전체 유형 중 가장 많다. 기자와의 인터뷰에 응한 시각장애인도 2명을 제외하곤 질환 탓에 서서히 시각을 잃은 경우였다. 이들은 "익숙해지면 신체장애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시각장애인 대부분이 장애 자체에 좌절 한다는 생각은 비장애인들의 편견이었다.

전시장 ‘어둠 속의 대화’를 운영하는 엔비전스의 송영희 대표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환경에 적응하며 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불행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그런 편견을 줄이면서 주변에 대한 소중함도 깨닫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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