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에 있는 낙원 악기상가에 들어서자 악기 연주소리가 울려 퍼졌다. 계단을 올라가니 상인들의 연주가 한창이었다. 사방이 악기로 둘러싸여 있어 5명만 들어가도 꽉 차는 공간, 이 곳에서 악기를 파는 상인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서울시 중구 입정동의 골목길에는 공업사가 빼곡하게 들어서있다. 대부분 20~30년간 골목을 지킨 유서 깊은 가게들이다. 작업을 하는 낮 시간에는 매캐한 쇳가루 냄새가 방문객을 반기지만 저녁 7시가 넘으면 골목은 칠흑같은 어둠에 쌓인다. 좁디 좁은 골목길, 가로등 밑에서 신명나는 사물놀이 한 판이 벌어졌다. 가로등 불빛을 조명삼아 연주되는 악기들은 모두 이곳 입정동 상인들의 손길로 만들어졌다.

▲연주자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참가자들을 이끌고 입정동 골목을 누비고 있다.

서울 시내의 골목이 이렇게 문화예술의 장소로 변하는 중이다. 서울문화재단이 작년에 이어 2회 째 시행하는 ‘복작복작 예술로 페스티벌’ 덕분이다. 지역주민의 예술적 잠재력과 지역예술의 역량을 결합해 서울의 골목길을 활기찬 문화공간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도시 활성화 사업이다. 종로구 낙원악기상가, 서초구 우면산, 은평구 수색동 광장, 마포구 아현동 행화탕, 마포구 성산동 마을카페, 중구 입정동 골목, 이태원, 관악구청,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 중구 수표동 문화공간, 마포석유비축기지. 이렇게 11곳이 지역주민의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하기 위해 6월 말부터 준비됐고, 행사는 9월 23부터 25일까지 진행됐다.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한 '복작복작 예술로' 페스티벌은 서울시 내 11개 동네에서 진행됐다. (자료= 페이스북 페이지 '복작복작 예술로 골목길 프로젝트')

기자가 지난달 24일 찾아갔을 때, 낙원상가는 상가 소개와 상인들의 색소폰, 기타, 피아노, 우쿨렐레 연주로  활기찬 분위기였다. 악기만 파는 공간이었던 낙원 악기상가가 연주회를 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상인들은 악기를 직접 만들고, 고치고, 연주했다. 악기의 고수라는 말이 어울렸다. 기타는 물론 평소에는 들을 기회가 없었던 마라카스까지 다양한 악기가 등장했다.

참가자 양희애(28)씨는 “투어나 행사 목적으로 상가를 찾은 적은 없었다. 기대 이상으로 스토리텔링을 잘해주셔서 알차게 둘러볼 수 있었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채한솔(22)씨는 퍼포먼스 투어를 통해 낙원 악기상가가 색다르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낙원 악기상가에 들른 적은 없고, 악기 상권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상인 분들이 직접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존경심이 생겼어요.”

25일 저녁 입정동에서는 주말이라 영업하지 않는 공업사의 셔터 문을 스크린 삼아 보여주는 영상과 사물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한 곳이 아니라 골목을 다니며 곳곳에서 연주되는 악기소리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주말 밤인데도 쇠를 뜨거운 열로 다듬는 공업사 안에서 신명나는 가락이 울려 퍼지자 골목 곳곳에 있던 상인들이 연주를 함께 즐겼다. 이날 연주에 쓰인 악기는 모두 이 공업사에서 만들어졌다. 참가자 서현성(43)씨는 “상인들도 함께 공연을 보면서 즐기니까 걱정거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입정동과 낙원상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상인들의 애환이 담긴 곳 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값싼 중국 제품의 유입으로 경쟁력을 잃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낙후된 지역이 되자 찾는 발길은 더욱 줄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입정동과 낙원상가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은 상인들이 잠시나마 즐거움을 느끼는 비타민 같은 존재이자 사람들이 다시 찾는 이유가 됐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공업사 장인 김철호(56)씨는 “정해진 소리 말고 다른 소리를 이용해서도 음악이나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고 말한다. 일상에 치여 예술에는 문외한이던 그는 프로그램을 계기로 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김철호(56)씨가 공업용 재료로 직접 악기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복작복작 예술로' 사업은 시민들에게 익숙한 골목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드는데 의의가 있다. '낙원의 고수' 프로그램을 기획한 팀 ‘소환사’의 임나래(33)씨는 악기 상가 상인들이 자신의 전문성과 장점, 매력을 재발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악기 상가가 매력적인 공간이며 그곳엔 단단한 내공을 지닌 고수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입정동 프로젝트를 기획한 소경진(38)씨는 시민들의 관심으로 입정동 골목이 더 오랫동안 보존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낯선 공간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공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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