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세대의 마지막을 새기는 명인 "다른 데서 못하는 좋은 도장을 계속 파주고 싶다."

▲현인당의 외부 모습

서울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4번 출구와 가까운 종로구 창신동 인장거리.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할 곳. 널찍하고 새 건물인 공인중개사와 매대 물품을 놓고 파는 옆집에 비해 쑥 들어가 있다. 푸른 간판의 현인당 내부는 밖의 분위기와 달리 조용하다. 3평이 안 되는 공간. 보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컴퓨터와 녹슨 기계. 둘러보는데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낡은 나무 조각으로 만든 네모 모양의 고정대에 인장대가 박혀있다. 도장 파던 이는 안경을 슬쩍 내리곤 묻는다. “그래, 어디서 오셨다유?

바늘 같은 펜을 흰색 물에 툭툭 찍어 납작한 도장 면에 한자를 한 획씩 긋기 시작한다. 5분이 지나지 않아 도장 한 면에 흰색 선이 가득 찼다. 나무 조각 몇 개를 뺐다 끼웠다 하더니 새로운 도장대를 끼운 구멍을 정확하게 조인다. 사포질을 마치고 새로 들어간 도장에 자를 댄다. 선을 따라 칼이 파고 들어간다. 날카로운 끝으로 몇 번 툭툭 친 것 같은데 작은 원안에 홈이 생긴다. 재빠른, 그러나 부드러운 손놀림이다.

▲도장을 고정대에 꽂고 밑 글씨를 쓰는 최병훈 씨

30분 정도를 앉아 있었는데 도장을 찾는 이는 생각보다 많았다. 일반전화로 주문하거나 직접 찾아온다. 그의 발이 놓인 자리가 움푹 패어 있다. 3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도장을 판 흔적이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 방은 37년간 도장을 파는 그의 삶과 닮았다. 최병훈 씨(58)는 인장거리에서 명장으로 불린다. 현인당은 37년 전에 상신당이라는 이름으로 도장을 파던 곳이다. 장소로 따지면 2대째, 기술로 따지면 3대째 도장 명인이다.”

▲밑 글씨 작업이 끝난 도장

기술은 사람을 타고 흐른다

“도장을 파러 올라온 게 21살이야. 고향이 예산이거든. 충남 예산. 집에서 쌀을 두 말 훔쳐가지고 왔어.” 최 씨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집이 어려우니 서울로 가서 기술을 배우든지 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듣고 무작정 상경했다. 당시 기계체조 선수였지만, 중학교 때 친구들과 선생님의 도장을 파주던 기억과 감각이 손에 남아 도장으로 기술을 배워보리라 결심했다.

“내가 중학교 때 도장을 팠어요. 그런 게 하고 싶더라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하면서 선생 도장도 파주고 애들 도장도 파주고 그랬던 거야. 한 번은 내 뒷자리에 괴짜 같은 놈이 지 아버지 인감도장을 다시 밀어 와서는 도장을 파겠다는 거야. 아버지에게 혼나려고 도장을 밀어왔냐고 했지. 밤새도록 며칠을 연구해가지고 진짜 한글로 걔 도장을 파버렸어. 이렇게 하는 거구나 했지. 연필 깎는 칼이 있었어. 그걸로 이렇게 쭉쭉 미니까 글씨가 되더라고. 희한하게. 다음부터는 모과나무 있는데 그걸 잘라다가 다 말려가지고 도장을 파버렸네. 그러고 옛날에 플라스틱 펜대가 있어. 그걸 또 막 갈아가지고 거기다 파버렸네. 미술 선생님도 ‘야, 너 어디서 이렇게 좋은 낙관(落款)을 새길 수 있냐’고 했지.”

최 씨는 종로의 YMCA 건물에 찾아가 도장을 배우겠다고 했지만 딱지를 맞았다. 아무나 못 하는 일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두 번째로 찾아가자 그제야 알려준 경기 부천이 다음 행선지가 되었다. “부천에서 도장 파는 이가 사부님과 친한 사람이었어. 칼 여섯 자루를 주면서 칼 가는 법을 가르쳐 주더라고.” 중구 명동을 거쳐 마지막으로 온 곳이 여기, 창신동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스승을 만났다.

“상신당이라고 있어. 내가 그 밑에서 9년을 배웠어. 하촌 조중선이라고. 우리 사부라.” 옛 생각이 나는지 상기된 목소리로 그때의 기억을 꺼내놓았다. 최 씨는 9년을 그 집에서 살면서 배웠다고 했다. 인장에 밑 글씨를 그리는 솜씨도 9년간 스승의 밑에서 연마한 기술 중 하나다. 거꾸로, 그러나 올곧은 필체로 새겨야 하는 밑 글씨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마련이다. 최 씨는 글씨를 받자마자 도장 위에 거침없이 흰 잉크로 그려나간다.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솜씨 중 하나다. 50년이 넘게 도장만 팠던 스승에게서 물려받았다. 9년 동안 스승 밑에서 도장 위 글쓰기만 몇 만 번을 연습했다.

그의 스승은 2대째 도장을 팠다. 기술은 최 씨에게로 넘어왔다. 수제자라고 이야기하는 그 역시도 5명의 제자를 두었다. 지금은 다 흩어졌지만 몇 명은 똑같이 손으로 도장을 판다. 서울 강동구 길동에 있는 예감 인장도 그중 하나다. 역사의 한 편에 존재했던 인장, 그리고 인장을 만드는 이들의 기술은 지금도 사람을 따라 흘러가는 중이다.
 
도장이 만들어지기까지

“옥에다 한 번 새겨서 써볼게.” 한참을 옛이야기로 함박꽃 피우던 최 씨는 옥으로 만든 인장을 파는 걸 보여 주겠다며 방 뒤편에 가장 낡은 기계 앞으로 이끌었다. 옥을 갈 수 있는 연마기다. 본래 초록색이던 기계는 흘러넘친 흰색 자국으로 덮여 무슨 기계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최 씨는 양 끝 모두 뭉툭하게 튀어나온 옥도장 대의 한 면을 갈아보겠다며 기계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기계가 켜지자 드르륵드르륵 소리와 함께 흰 물이 흘러나왔다. 옥이 갈아지면서 나오는 물이었다. 한바탕 물이 빠지고 나서 옥도장은 실체를 드러냈다. 뭉툭했던 면 대신에 곱게 갈려 납작해진 면이 남았다. 사포질을 거쳐 고무를 붙인다. 다음은 조금 전에 새기고 팠던 동작의 반복이다. 요약하면 도장 면 갈기→ 사포질→ 붓펜으로 밑 글씨 쓰기→ 칼로 글씨 따라 파기(넓은 면적은 기계로 손쉽게 파고 나머지 정교한 부분을 칼로 판다)→ 시야게( 우리말로 마무리 작업)의 순이다. 

▲최병훈 씨가 연마기로 옥도장을 가는 모습

도장의 재료는 악귀를 쫓는다는 대추나무부터 상아, 옥, 물소 뿔, 회향목, 박달나무 등 천차만별이다. 상아, 뿔, 옥의 경우엔 다른 나무 도장과 달리 더 정교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오천 원에 ‘막도장’이라는 이름을 붙여 기계로 뽑아내는 오늘날과 달리, 도장의 가치는 재료에서부터, 파는 이의 손길로부터 만들어져왔다.

그의 방 한구석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과 법정 스님이 직접 쓴 글이 보인다. 스승과 함께 일하던 시절, 하루 80~100개의 도장을 팠다. 박 전 대통령과 법정 스님이 고객이었다. 복싱선수 홍수환, 지방검찰청 관인도 있다. 지금까지 35만에서 45만 개. 안 판 도장이 없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가장 기억이 남는 경우는 외국인의 도장이라 했다. “고려대 총장이 와서 아프리카 특사의 낙관을 새기는데 이름이 프라프티 웜 싸무리인이었어. 그래서 그걸 한글로 새겨버렸어.” 최 씨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최병훈 씨가 판 도장 중 일부

쌀 두 가마니에서 수십억까지

그의 가게를 본 사람이면 이곳에서 최 씨가 수십억 원까지 벌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목동에도 백화점이 있는데, 행복백화점 거기도 나한테 파 가. 내가 택배로 보내주거든.” 처음 쌀 두 가마니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보았던 입이 떡 벌어지던 도장 포였다. 이제는 거기보다 더 큰 시장으로 그의 도장들이 팔려나간다.

수제로 판 도장이 점점 사라지는 까닭에 제대로, 잘 파는 수조각 인장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그가 보여준 택배 종이는 수십 장이다. 목동의 ‘행복한 백화점’에는 한 달에 180~200개 납부한다. 경기 구리, 충남 예산 등 전국 각지로 최 씨의 인장이 나간다. 이런 수요를 맞추느라 최 씨는 지금도 책상 앞에 종일 앉는다. 제자들과 하루에 80개에서 100개까지 파던 그때보다 수요가 줄었지만, 아직도 호황이다.

“내가 이걸로 몇 십 억을 벌었어. 아들들도 돈 걱정 없이 다 키웠어. 진짜여. 내가 이렇게 앉아있으니까 무슨 돈을 벌까 하는데….” 9년간 기술을 익히고 이미 30대에 자신의 손으로 집 두 채를 장만했다는 뿌듯함, 그리고 아들들을 도장 하나로 키워낸 자부심이 느껴졌다.

도장 수요는 확 줄었다. 파가는 사람이 줄어서일까, 아니면 컴퓨터와 기계로 대체되어서 그럴까. “한 번은 어떤 사람들이 수도장을 팠다며 갖고 왔는데 보니까 기계로 판 거야. 직접 판다고 내일모레 오라더니 기계로 판 거야.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 창신동 인장거리에서도 손으로 하는 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 최 씨는 “손으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난리다. 여기서도 70 가까이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말했다.

요즈음에는 컴퓨터로 글씨체를 설정하고, 디자인을 완성하면 연결된 기계에서 도장을 뚝딱 파준다. 쉽게 쉽게 만들어주는 까닭에 가격은 싸다. 그러나 손으로 판 것과 달리 가치가 없다고 최 씨는 말한다. 그는 “내가 그리기 때문에 똑같은 도장을 10번, 100번 파도 다 다르다. 그래서 손으로 판 건 위조하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중으로 글씨를 겹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의 손을 통해서만 나온다. 기계도 따라가지 못하는 기술이다. 단골손님 외에도 이렇게 사람의 땀이 묻은 인장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온다.

▲단골손님이 찾아와 최병훈 씨에게 도장을 맡기고 있다.

한 자, 한 자를 새기는 이유

그는 앞으로 10년은 더 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니, 눈이 안 보일 때까지 계속 도장 파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최 씨는 도장에 이름을 새기면서 남는 공간에 점을 찍어주기도 한다. 복이 들어가라는 의미다. 복싱선수 홍수환의 도장에도 점이 하나 있다. 도장을 새기면서 이름이 몇 수냐에 따라 이름의 길(吉)을 점쳐주기도 한다.

도장을 만들면 꼭 한번 종이에 찍는다. 이런 종이는 서랍 안에 모아놓는다. 꾹 눌러 찍는 동작은 자신의 손으로 잘 만들었음을 확인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좋은 도장을 파주고 싶은 마음. 다른 데서 못하는, 좋은 도장을 파주고 싶다. 그게 내 답이야. 왜냐면 다른 데서는 다 컴퓨터로 하니까. 정성을 다해서 내 마음을 전하는 도장을, 그런 도장을 난 하고 싶지.”

▲완성된 도장을 종이에 찍는 모습

딱딱딱…. 그의 손길은 계속 움직였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선 때부터 마지막까지.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섞이는 땀과 호흡. 이름 새기는 일을 넘어 마음을 담고, 복을 담고 싶어서 패인 자리에 앉아 나무 지지대를 돌리며 오늘도 도장세대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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