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수 : 가출

 







첫째날

 











1. 하수 : 가출

 



 

 


 

  출은 역시, 가을에 해야 제맛이다.
  여름엔 땀이 나고, 겨울엔 자칫하면 얼어 죽고, 봄에는 온몸이 나른해서 그럴 기분이 영 안 나니까.
  그와 달리 가을의 상쾌함은 길을 나서기 쉽게 만들어 준다. 깊어서 멀어 보이는 하늘과 나풀대는 가로수 잎사귀가 사람의 마음을 총총거리게 만든다고나 할까? 창가를 서성이다 작은 가방을 꾸려 산책이라도 가듯이 가볍게 집을 나서기에 좋다. 지금 이렇게 정신이 반쯤 없는 상태에서도, 가을에 나오긴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할 정도니까. 청계천에서 바라보는 가을 풍경은 뭐 하나 더하거나 뺄 나위 없이 샤갈의 그림처럼 완벽하다. 그래, 문제는 가출이 아니야. 가출을 하자마자 가방을 도둑맞은, 재수가 옴 붙은 상황이지! 나는 하늘에 대고 따지듯이 마구 손가락질해 본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도끼병도 정도껏 해야지, 어쩌다 그런 착각을 한 걸까? 그놈은 가방을 훔치려던 건데, 나 혼자 좋아서 호들갑을 떨었으니 얼마나 웃겼을까? 그래도 딱 마음에 들었는데… 하, 이런 상황에서도 스쳐간 바람을 아쉬워하다니, 미쳤다, 미쳤어! 구제불능 은하수! 한심할 따름이다. 아니지, 따지고 보면 나쁜 건 도둑놈인데, 왜 내가 날 탓하는 거야? 남의 가방을 갖고 날은 놈이 문제지! 계획적인 범죄가 틀림없다고. 아니면 그렇게 완벽하게 지하철을 빠져나갈 수는 없어. 괴도 뤼팽처럼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내 정신을 쏙 뺀 훈훈한 낯짝마저도 일을 쉽게 하려는 수단이 분명해. 그러고 보니 ‘요즘은 날치기들 사이에서도 성형이 유행’이란 기사를 인터넷에서 본 듯도 하다. 난 꽃미남 도둑한테 홀린 불쌍한 피해자라고, 흑흑. 누가 그런 얼굴을 안 쳐다보고 배길 수 있겠어?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이지만 위로가 된다. 그런다고 잃어버린 가방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도둑놈의 발을 단 가방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허겁지겁 돌아와 미친 사람처럼 한참이나 들쑤시며 헤맸지만, 미로처럼 복잡하고 사람으로 붐비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우울과 실망이 마구 뒤섞여 잡탕인 상태로 역 근처 청계천으로 와, 헝클어진 머릿속을 가다듬는 중이다.
  처음에 112로 신고라도 했으면 잡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177 서울콜센터? 봄에 수혁과 남산에 올랐다가, 남산도서관에서 N서울타워로 올라가는 길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의 이름을 177에 물어본 적이 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반쯤은 뭐든 대답해 준다는 콜센터를 놀리는 기분으로 둘이서 킥킥거리며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의하신, N서울타워 근처, 높이 약 200에서 230미터 지점에 위치한 그 나무는, 편백나무입니다’라는 여자 상담원의 응답이 이어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남산에서 굴러떨어질 뻔 했다. 신속함과 정확함에 우리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던 그들에게 다시 한번 의지해 볼까? 혹시 아냐고. ‘오전 11시쯤, 오이도행 지하철 4508번 차량에서, 분홍색 여행 가방을 들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내린 미남 도둑은, 10번 출구로 나갔습니다’라고 말해 줄지도?
  지갑은 여권, 휴대폰과 함께 어깨에 메고 있던 크로스백에 넣어 둬서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112에 신고할까? 하, 집을 나설 때 끈 폰을 다시 켜고 싶지는 않아. 지금까지의 수더분한 삶에 대한 연결 고리를 끊는다는 각오로 배터리까지 뺀 나라고. 1시간도 안 되서 다시 켠다는 건, 난데없이 도둑질을 당한 것보다 더 불길한 낌새이자 엄마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항복과도 같으니까. 밑도 끝도 없이 긍정적인, 다른 말로 하자면 눈앞에 펼쳐지는 어떤 나쁜 일에도 별로 영향을 안 받는 내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그곳으로 돌아만 가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섣부른 희망, 심지어 가방이 아직 그 자리에, 놈이 내린 승강장 앞에 떡하니 놓여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기대까지 했으니까. 멍청하긴! 당연히 놈은 가방을 들고 오페라의 유령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아쉽지만, 내 첫 가출은 이대로 막을 내려야 하는 걸까?

  에휴.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온다. 마른 오징어처럼 좀처럼 안 끊어지는 질긴 싸움. 떠올리기만 해도 신경질적으로 무릎이 달달 떨리고, 손오공의 머리띠라도 빌려 쓴 듯 관자놀이를 조이는 편두통이 일어난다. 이른바 꿈의 직장이라는 대기업의 과장인 아빠와 명문 대학을 나와 교양이 철철 넘치는 엄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눈만 마주치면 서로 불꽃 튀게 싸운다. 그러려면 결혼은 왜 했을까?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말이다. 아니, 그래서 싸우는 걸까? 아빠가 없을 때 엄마가, 엄마가 뒤돌아서면 아빠가 나에게 하소연처럼 늘어놓는, 서로에 대한 비난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하수야, 아빤 왜 항상 제멋대로 굴까? 놀던 물은 못 속인다더니, 누가 경상도 남자가 아니랄까 성깔을 부리는 것 좀 봐!”
  “네 엄만 무슨 여자가, 자기주장이 고래 힘줄보다 더 질기냐. 아빠 정도의 인격이니까 참고 산다, 살아.”
  그뿐 아니다. 무슨 일로 말다툼을 시작하든 마지막 불똥은 왜 꼭 나한테로 튀냐고! 나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대추나무보다 더 억울하다니까?
  “하수야, 넌 이 아빠 맘 이해하지? 은하수, 아빠 말 듣고 있냐?”
  “딸, 왜 아무 말이 없어. 엄마 말이 맞아, 안 맞아?”
  하. 둘이 똑같으니까 싸우는 거 아니냐고, 그만 좀 하시라고! 이렇게 속으로, 백만 번은 소리쳤다. 에휴. 1등에 당첨된 로또를 준다 해도 안 돌아간다. 남들은 사춘기에 졸업한다는 가출을 대학생이 돼서야 시도했다고!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출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가지는, 아주 당연한 생존 본능인지도 모른다. 때가 되면 벌거벗은 맨몸으로 죽을힘을 다해 기어 나가야만 살 수 있으니까. 아무리 엄마 뱃속이 편안하고 안전하다 해도 누구도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엉덩이를 두드려 맞아가며 호흡을 터뜨리고 자기 몫의 삶을 온전히 시작하기 위해서는, 나를 기다리는 미래가 아무리 볼품없다 해도, 비좁게 열린 막막하고 두려운 터널을 뚫고 나와야만 한다. 첫 가출이다 보니 뭔가 중요한 의미를 두려고 갖다 붙이는 말이지만, 그래도 뱉고 나니 이번 가출에 대한 역사적인 사명감 같은, 알 수 없는 기운이 솟구친다. 인생이 엿 먹으란다고 맥없이 당할 수는 없어! 아자, 아자, 힘내자고!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벤치에서 일어나 조금 걸어가자, 한가롭게 노니는 1쌍의 돌거북 뒤로 아치형의 건축물이 보인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오간수문(五間水門)이라는 이름과 설명이 적힌 안내문이 보인다.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도성을 빠져나가도록 만든 5개의 무지개 모양 수문으로,
1907년에 일제가 물이 잘 흘러가게 한다며 중추원을 시켜 모두 헐어 버렸던 것을
청계천 복원 사업 때 다시 만들었다.

 

  기가 막힌 건 바로 다음 말이다. 바로 이 수문이, 도망치는 죄수나 성에 몰래 들어오려던 도적이 이용하던 조선 시대의 비밀 통로로, 임꺽정도 바로 여기로 달아났다는 말씀! 내 가방을 훔친 도둑놈이 혹시 이쪽으로 달아났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웃기는 일이 아닐까? 누가 따라오는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기를 쓰고 도망쳤을 놈의 모습을 상상하자, 허파가 들먹거릴 정도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심각한 건 충분해. 그만 가자. 어디로 갈지는 걸어가면서 정하자고.

  손목시계를 본다. 오전 11시 33분. 집에선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시간이다. 나오기 전에 컴퓨터로, 에어 프랑스가 출발하는 오후 2시에 문자가 가도록 예약했으니까. 나도 굴릴 머리라는 게 있는 사람이다. 파리로 떠난다고 곧이곧대로 쓰진 않았다.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되면, 세계 최고의 헬리콥터 맘인 우리 엄마는 메르스나 에볼라가 의심된다는 둥 잘 만들어 낸 거짓말로 세계보건기구를 움직여서라도 무시무시한 손길을 뻗칠 사람이니까. 나에 대한 엄마의 집착은, 누가 봐도 질릴 정도로 유난스럽다. 12시간이 넘게 하늘을 날아간 보람도 없이, 샤를드골공항을 나서지도 못한 채,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질질 끌려올 수는 없다고. 과제물 준비를 위해 학교 도서관에서 혜수와 밤을 샐 거라는, 나무랄 데 없는 문자가 엄마에게 곧 도착한다. 지하 1층 휴게실에 있어서 폰으로 연락이 안 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나는 이미 운명의 주사위를 높이 던졌다. 공중에서 거둬들일 생각 따윈 없다.

  터덜터덜 지하철역으로 걷다 보니, 대형 TV만 한 바위에 쓰인 굵은 글씨가 또 눈에 들어온다. 청계천에는 볼거리가 꽤 많다니까?
 


  바위 뒤 작은 덤불에서 초록 잎새가 요기조기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하필이면 영주냐고. 그곳은 우리 할머니가 사시는 시골, 아빠의 고향이다. 언젠가 다 함께 오른 소백산 부석사에서 내려다보던, 온 산허리를 뒤덮고 복슬강아지 털처럼 탐스럽게 돋아났던 철쭉꽃. 자기 고향에 뿌리박아서인지 위풍당당하게 산바람을 타던 분홍빛 물결이 떠오른다.
  청계천의 철쭉은 서울 물을 먹어서인지 촌스런 억셈이 빠진 대신 새침한 애교가 넘친다. 하지만 제자리가 아닌 남의 자리에 앉은 듯 어쩐지 시들시들하다. 올해 유난히 폭우가 이어지던 도시의 여름을 겪은 탓일까, 아니면 저 멀리 경상북도 어딘가 조상의 씨가 뿌려졌던 고향에서 머나먼 서울, 청계천 귀퉁이로 옮겨와 말 못할 향수병에라도 걸린 걸까. 철쭉을 바라보며 나무 계단을 오르는데, 이번엔 아래쪽 어디선가 푸드득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맵시 좋은 흰뺨검둥오리 부부가 눈을 모로 내리뜨고 존재감을 한껏 뽐내는 소리다. 자맥질을 할 때마다 요란스레 물을 좌우로 털며 몸단장하는 폼이 연예인병에 걸린 사람도 저리 가라다. 꼬르르르르륵. 온몸에서 반짝이는 생명력을 비늘처럼 뚝뚝 떨어뜨리는 오리들을 보자, 예사롭지 않은 상황 전개에 눈치를 보며 잔뜩 움츠려 있던 내 창자가 제 몸을 꼬아가며 마구 비명을 지른다. 하긴 내 별명이 괜히 위 하수, 위 처짐이겠어?
  “내일 지구가 멸망하고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도 먹던 숟가락을 안 놓을 사람이야, 넌.”
  수혁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놀렸지. 그래, 나답게 일단은 뭐라도 좀 먹고, 힘내서 도둑놈을 잡으러 가야겠다. 보란듯이 내 첫 번째 가출을 성공시키자고.
  기다려! 반드시 내 손으로 잡고 만다.
 



1회
* 소중한 시간을 내어 남산의 편백나무에 대한 자문에 응해 주신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산업연구과 강진택 박사님과 중부공원녹지사업소 이무림 조경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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