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운 : 훔치다

 

 

 








첫째날




 

 

 







2. 운 : 훔치다

 

 

 

 

 

 

 

  20분 전, 청계천

  도망쳐! 잡히면 끝장이야!
  문득 궁금하다. 부모님이 아신다면 내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며 도리질하며 나를 감쌀지, 아니면 자수해서 밝은 빛을 찾자며 경찰서로 데려갈지. 하늘에 대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니, 심하게 체했을 때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내 왼손이 모르게 오른손이 저지른 일은 아니다. 충분히 고민했고, 안 잡힐 자신도 있다. 그래 봤자 사람을 해친 것도 아니고 고작 가방 하나 훔쳤을 뿐이잖아? 후아, 근데 왜 이렇게 심장이 벌렁거리는지, 미치겠다! 온몸에 돋은 털이란 털은 모조리 일어서서 당장 가방을 돌려주라며 아주 떼창을 한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놈이었나?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지. 투명한 낚싯줄이 뒤통수를 사정없이 끌어당기고 발걸음이 자꾸만 서둘러도, 절대 뒤돌아보거나 이상한 티가 나게 뛰면 안 된다. 딱 봐도 여자 취향인 여행 가방을 들고 헐레벌떡 도망치는 남자만큼 눈에 띄는 놈도 없다. 거리에 차고 넘치는 외국인 관광객 속으로 자연스레 녹아들면 그만이야. 예상대로, 두타와 밀리오레 앞은 넘치는 돈을 쓰러 나온 여러 대륙의 가진 자들로 북적이고 있다. 아싸! 누구 선택인지, 끝내준다! 원래 내 가방인 것처럼, 저 멀리 외국 공장에서 푸른 눈의 장인이 바늘로 한 땀 한 땀 박아 만들던 순간부터 이미 내 손에 들어오기로 정해졌다 생각하고 이리저리 멋대로 날뛰는 가슴을 가라앉히자. 아니, 지금 이 순간부터는 아예 나 스스로도 그렇게 믿어 버려! 안됨 말고.

  얼른 낙산공원에 올라 가방을 열어 봐야지. 린에게 통째로 선물할 수는 없잖아! 어디서 가방을 구했다고 하지? 누군가 버리려고 내놓은 재활용품 더미에서 기적처럼 발견했다고 둘러댈지, 청계천 중고 시장에 아주 싸게 나왔더라며 거짓말을 늘어놓을지 저울질하는 중이다. 린은 자존심이 센 녀석이라, 아무리 자기가 꿈에 그리던 가방이라 해도 남이 쓰던 물건이라고 하면 싫어할 게 분명해. 후아, 린이 매일매일 노래를 부르던 바로 그 가방만 아니었다면, 절대로 안 훔쳤을 거야. 노랑과 초록 지붕의, 애들 장난감 같은 뾰족한 집이 빼곡히 그려진 명품 가방… 린은 늘 다 자란 어른처럼 굴지만 가끔 얼떨결에 들키는 모습에선 나이다운 사랑스러움이 흠뻑 묻어난다. 엄마를 똑 닮아 아기자기하기도. 이 가방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싸서, 돈을 주고 새로 샀다고 하면 안 믿을 게 뻔하다. 어쩌지?
 

 





 

 
 







   이런저런 핑계를 짜내며 가진 자들의 흉내를 내서 일부러 천천히 오간수교를 건너간다. 불판 위의 곱창처럼 바짝 쪼그라드는 심장을 억지로 부풀리며, 언제라도 들고뛸 준비 완료! 아마도 여자애는 지하철에서 못 내렸겠지만, 경찰에 신고했을 가능성은 있잖아?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처럼 한국의 번쩍번쩍한 오늘을 보여 주는 산뜻한 건물들, 허리띠를 졸라매던 옛날 느낌 그대로의 평화시장이, 6백 년이 넘도록 같은 자리에 버티고 선 동대문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역사의 증인들처럼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양심을 짓누르는 무거운 시선을 털어 버리곤, 청계천을 따라 계속 걸어간다.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이대로 버들다리와 나래교, 마전교를 지나면 종로 5가 광장시장이 나오고, 시장을 통과해 이화사거리 방향으로 죽 올라가면 낙산공원이 있는 대학로, 혜화다. 아기를 태운 유모차라도 돌보듯 가방을 내려다보며 걷다 보니,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던 인도의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 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벽돌 사이로 신기한 금색 판이 길을 따라 촘촘히 박혀 있어, 랩을 하듯 하나하나 읽어 본다.
  “상식과 원칙이 지켜지는 자유로운 세상을 위하여.”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영원히 살아 숨 쉴 전태일 정신이여!”
 


  손바닥만 한 판에는 요즘 시대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초경쟁 사회의 엇박자 같은 잠꼬대만 가득하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어려운 판에 인간다움까지 바랄 순 없잖아? 타오르는 촛불이나 조각배 같은 그림과 별 아무개들의 이름이 적힌 것도 군데군데 보인다. 모르는 사이에 또 이런 일도 일어난 건가. 어디선가 이런 일을 하겠단 발표를 하고, 누군가 며칠을 고민해서 글을 생각하고, 어느 공장에서 쇠를 두드려 글자를 새기고, 얼굴도 모르는 막일꾼들이 땀 흘리며 벽돌을 파내고 판때기를 박았겠지. 이렇게 긴 시간과 과정, 벌떼처럼 많은 사람의 머리와 손을 거치는데도 더 많은 시민 대부분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숱한 일들이 이루어지고 사라진다. 민주주의 사회라 해도 그렇다. 하긴 나는 신문도, 뉴스도 잘 안 보니까 내가 모른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님 말고.
 
  그건 그렇고, 전태일이 누구더라? 일제 강점기에 이름을 날리던 독립투사던가? 용감한 사람이었다고 어디선가 흘려들은 거 같은데… 맞아, MC 스나이퍼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에 나왔지! 내 머릿속 저장소에서 자동으로 노래가 튀어나와 혀를 타고 춤춘다. 잠깐! 윽, 자기 몸에다 불을 지르다니, 무슨 짓이야? 그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판들은 또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렇게 가방과는 전혀 상관없는 궁금증에 사로잡혀, 어느새 나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닥만 보며 걷고 있다. 가방이고 나발이고 내 앞에 던져진 모든 문제를 잊을 만큼, 길바닥 풍경은 눈이 부시도록 인상적이다. 무언가에 반쯤 홀린 상태로 버들다리에 다가가 다리에 붙은 이름을 보자, 그제야 조금은 이해가 간다.

 

                     전태일다리
                  버들다리

 

 

 
 


 

 

 

 

 



 

  2005년인가? 청계천을 복원한 다음부터 줄곧 지나다녔는데, 이제야 이 다리에 다른 이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아, 눈만 뜨고 다닌다고 제대로 보는 건 아니잖아? 여전히 이 다리가 왜 전태일의 다리인지, 그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리 입구에 전태일다리에 대한 안내문이 새겨진 대리석이 붙어 있지만, 멈춰서 읽을 여유는 없다. 그래도 노래 가사를 곰곰이 되씹어 보면, 이건 뭔가 의미 있는 일 같다. 침묵하는 먹물들을 대신해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몸으로 행동한 사람이라고 했잖아? 나야 누굴 위해서든, 뭘 위해서든, 나중에 국회의사당에 내 동상을 세워 준다 해도 몸을 불태울 생각은 없지만. 
 


 
  버들다리에서 나래교까지는 판이 훨씬 드물다. 전태일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억은 한쪽에서만, 여기까지인가. 게다가 지금까지와 달리 판이 나래교에서 버들다리 방향으로 박혀 있어 거꾸로 보이는 글자를 읽으려니 어질어질해서 이쯤에서 그만두고, 주변만 살피며 나는 계속 걸어간다. 수건 가게, 모자 가게, 신발 가게 등 고만고만한 가게가 청계천 양쪽으로 죽 늘어서 있다. 긴 건물에 포장마차가 줄줄이 박힌 것 같다. 상가 사이로 너풀너풀한 레이스 끈을 잔뜩 내건 가게가 보여 눈길이 간다. 가방 손잡이에 리본을 매 주면 린인 좋아서 방방 뛰겠지? 그런 생각에 가게로 다가서려다, 가방을 든 내 모습을 혹시나 기억력이 좋을지도 모르는 가게 주인에게 보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그머니 물러난다.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미련을 날리고, 나는 다시 청계천의 오리처럼 부지런히 다리를 놀려 재빠르게 광장시장을 통과한다. 가게마다 쌓인 푸짐한 순대와 화끈하게 고소한 마약 김밥, 구수한 빈대떡 냄새가 사방에서 풍겨 온다. 입속에 고인 군침이 덩어리져서 대장까지 뚝 떨어지는 기분이다. 확실히 여기는, 아파 두드릴 정도로 배가 불러서 오더라도 순식간에 다시 허기지게 만드는, 무한대로 식욕을 돋우는 마력을 지닌 곳이다. 혹시 곧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죽기 전에 이곳에 꼭 한번 와 보길 강력히 추천한다. 먹기 위해서라도 좀 더 살고 싶어질 거야! 아님 말고.
 



  후아, 그나저나 이 가방, 더럽게 무겁다! 여자들은 뭘 이렇게 많이 넣어 다니는 거지? 어디 갈 땐 칫솔이랑 수건이면, 끝이잖아. 뭐, 굳이 더하자면 양말하고 속옷… 속옷? 여자 속옷을 상상하자 아랫배에서부터 찌릿찌릿한 기운이 간질간질 올라온다. 윽,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열어 보면 알겠지.
  나는 오늘,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남의 물건을 훔쳤다.


 


 

* 오간수교 주변안내도 사진의 사용을 허락해 주신 서울시설공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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