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진(24・가명)씨는 매달 여성만이 겪는 신체변화를 겪을 때마다 그때 생각에 괴롭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다. 지난해 대학에서 강의를 듣던 도중에 예상치 못하게 월경이 시작됐다.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가 급히 위생용품을 구매하고 화장실에 다녀온 후 강의실로 돌아왔다. 어디에 다녀왔냐는 교수에게 허 씨는 당황하며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교수는 ‘화장실에 그렇게 오래 다녀오는 게 말이 되냐’며 허 씨에게 소리를 지르며 면박을 줬다. 남학생들도 있었기에 허 씨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후 교수에게 월경 때문이었다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자신의 불쾌한 마음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자 교수는 ‘메일을 공개하겠다’며 허 씨를 협박했다. 허 씨는 교수에게 사죄해야만 했다. 생리현상을 학내에 공개하겠다는 교수에게 허 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성인에게 있어서 생리현상의 은밀한 처리는 개인의 존엄과 인격을 유지하기 위하여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특히나 월경은 오랜 과거부터 숨겨야 하는 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허 씨의 생리현상을 공개하려 한 교수의 행동은 헌법 제10조에서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치는 인권침해다. 그런데도 사과는 교수가 아닌 허 씨가 해야만 했다.

병원부터 화장실까지 … 장소 불문 인권침해

비단 대학 내의 일이 아니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임신 확인하러 오신 거죠?”. 큰 목소리로 묻는 직원의 목소리에 산부인과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박시은(21・가명) 씨를 향했다. 그중엔 여성과 함께 온 남자들도 있었다.  최근 혼전 임신으로 관악구의 C 산부인과에 방문한 박 씨의 일이다. 박 씨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박 씨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계산대에서 신상 정보와 방문 사유를 서류에 적어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임신 사실이 수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것이다.

의료법상 환자의 진료 정보는 비밀 보호 대상이다. 이를 간과한 직원의 행동은 헌법 제17조가 규정하고 있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인권침해 행위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병원 측에 박 씨는 어떠한 항의도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어린 나이에 산부인과를 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던 박 씨는, 그 후 산부인과 방문이 더욱 두려워졌다.
 

▲남자 화장실 내부 사진. 화장실에서도 인권침해가 일어난다.

모든 사람이 매일 사용하는 화장실에서도 인권침해는 일어나고 있다. 박진형(25・가명) 씨는 최근 일주일 사이에 4번이나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강남의 A 어학원에 다니는 박 씨가 학원 건물에 있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여성 미화원이 들어왔다. 화장실엔 박 씨를 비롯해 소변을 보고 있는 남성들이 많았다. 그러나 여성 미화원은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벌컥 들어와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청소를 했다. 박 씨는 불쾌한 기분으로 한 발짝 더 앞으로 몸을 옮기며 재빨리 용변을 보고 나와야 했다.

박 씨는 “남자 화장실에 여성 미화원이 들어오는 건 굉장히 흔한 일”이라며 “그러나 상황이 자주 반복되니 매우 불쾌하다”고 말했다. 이어 박 씨는 “이런 상황이 인권침해라는 인식조차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용변 행위가 타인에게 공개되는 것은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끼기 충분한 인권침해다. 얼마 전 법원은 경찰서 유치장에 설치된 개방형 화장실이 헌법상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등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점에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일상 속 화장실은 인권침해의 사각지대로 남겨져 있다.

지인을 통한 인권 침해도 …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일상 속의 인권침해가 빈번하다. 기성 언론에 종종 보도되는 폭력, 학대 혹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외에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상 속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다. 외국인, 장애인, 노동자와 같은 특정 대상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남녀노소 불문 누구나 인권침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위의 사례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인권침해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SNS 트위터 검색 화면 캡쳐. ‘인권침해’ ‘인권침해 경험’ 등으로 검색하면 인권침해 경험을 담은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까운 지인을 통해 인권을 침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배지영(26・가명) 씨는 직장 동료에게 본인이 시술을 받았던 분당의 B 성형외과를 추천했다. 배 씨가 직접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지만, 배 씨는 며칠 후 당황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턱, 보조개 필러 맞으셨다면서요?”. B 성형외과에 다녀온 동료가 배 씨의 시술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다. B 성형외과의 간호사가 배 씨의 시술 여부를 동료에게 전부 이야기한 것이었다. 배 씨는 의료 정보를 포함한 사생활을 침해받았다는 사실에 매우 화가 났다. 그러나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한 동료의 태도에 배 씨는 화를 내지 못하고 속앓이만 했다.

낮은 인권의식, 부실한 인권교육 … 피해자만 아프다

일상 속 인권침해의 문제는 피해자에게만 심각하다. 우리 사회의 낮은 인권의식으로 인해 가해자는 자신이 인권을 침해했다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의 낮은 인권의식으로 인해 일상 속에서 가해자는 손쉽게 인권을 침해하고, 피해자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일반 국민, 전문가, 학생 등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발표한 <2016년 국민 인권의식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33.4%만이 인권이 존중되고 있다고 봤다.  또한 인권침해 혹은 차별을 받았더라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비율이 77.9%에 달했다.

낮은 인권의식은 부실한 인권교육 탓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인권위원회나 교육기관에서 인권교육을 진행하긴 하지만, 주로 일회성 강연 위주로 이뤄진다. 인권의식이 형성되는 청소년기의 인권교육은 턱없이 부실하다. 서울시 학생 인권조례 제29조가 명시하고 있는 인권교육 시간은 학기당 2시간뿐이다. 심지어 인권교육이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정작 교육내용은 다른 교육을 진행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인권위의 조사결과, 국민의 12.8%만이 인권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마저도 대부분 초‧중‧고등학교(44.3%) 등 교육기관을 통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성인을 위한 상시적인 인권교육은 찾아보기 힘들다.

외국의 인권교육은?

반면 외국의 인권교육은 우리나라의 인권교육보다 더욱 실용적, 적극적이며 정기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초등학교 교과과정에서 시민교육 교과서를 통해 인권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교과서의 첫 단원 전체가 인권을 다루고 있다.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의 내용과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정도에 그치는 우리나라의 교과서와는 달리, 프랑스의 교과서는 인권을 일상생활 속에 적용 가능한 개념으로서 다루고 있다. 미국의 인권교육은 사회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협력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각계각층의 전문가, 교육자, 그리고 활동가들이 협력하여  ‘인권교육 국민운동’과 같은 범국민적인 인권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교육은 어떨까. 말레이시아의 경우 2009년부터 교육부와 인권위원회가 함께 ‘인권 교육 프로그램(Human Rights Best Practices Programme, HRBPS)’을 시작해 적용 지역 및 학교를 확대해오고 있다. 우리나라가 중·고교 사회과목의 교과서에서 ‘인권’ ‘정의’ 등의 단원들을 통합, 축소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권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인권교육 확대에 힘쓰고 있다. 필리핀 또한 인권 증진 프로그램(The Human Rights Promotion Program)을 확대하며 기초 교육과정에 인권교육을 포함하고 제도화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교육 이외의 인권의식 개선 활동에 적극적인 국가들도 있다. 러시아는 전 국민 인권의식 개선을 위해 2015년 9월부터 러시아 사회방송국(STR)에서 매주 인권교육 프로그램 ‘인권(Human Rights)’을 방영 중이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인권 증진을 위한 활동으로 소셜미디어 캠페인(#OurRightsSNAP 등)을 진행했다.

전문가 “인권교육 보완 필요”

일상 속 인권침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인권교육을 보완해 인권의식을 기르는 것이 시급하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염형국(43) 변호사는 “인권침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문제”라며 “인권의식을 기르는 교육과 상시적인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아샤 (가명 ・ 나이, 본명 공개 거부) 또한 “현재의 인권교육은 성교육처럼 일회성이자 의례적으로 실시하는 경우가 많다”며 “인권교육이 청소년기부터 꾸준히 시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인권교육 보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인권위는 최근 발표한 <2016년 국민 인권의식 조사>에서 정규 교육과정에서의 인권교육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학생들의 인권의식 형성에 있어 교과서와 학교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학교 내 인권교육의 내용을 체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사회 교과서의 독립적인 장(chapter)으로 인권을 구성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전문가들은 인권교육의 양적 확대와 질적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교사, 사회복지사 등과 같이 인권교육과 직접 관련된 직업을 제외하고는 인권교육을 이수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따라서 기업, 직장에서 인권교육을 시행하는 등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인권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권교육의 질적 강화를 위한 노력도 동반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인권교육이 인권 관련 지식뿐만 아니라 반인권적 행동과 태도의 수정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일상생활과 연계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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