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에게도 무방비 노출

남성 출연자가 와인 잔 가득 소주를 퍼붓고는 단숨에 벌컥벌컥 마신다. 그다음 출연자는 소주 두 병을 꺼낸다. 그는 “소주 잔 따위는 필요 없다”며 양은 냄비에 소주를 콸콸 쏟아 붓는다. 또 다른 이는 바지 앞섶에서 소주병을 꺼내 잔에 가득 채운 뒤 한 번에 들이켠다.

이 동영상을 올린 개인방송 진행자는 위 장면들을 '사나이의 소주 마시는 법'이라고 소개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잘 사용하면 여자 친구가 생긴다”며 폭음을 부추기기도 했다. 국내의 대형 주류회사 한 곳과 광고 계약을 맺고 제작된 이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조회 수 270만 건을 넘겼다.

술은 세계보건기구(WTO)가 정한 1급 발암물질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3월 10년 만에 ‘암 예방 수칙’을 개정해 "하루 한두 잔의 소량 음주도 피하기"를 권고했다. 지난해 9월에는 ‘술이 발암물질’임을 주류용기에 의무적으로 표기하도록 고시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음주를 부추기는 동영상들이 유튜브에 여전히 난무하고 있다.
 

▲유튜브 화면 캡쳐. 국내 주류업체와 광고 계약을 맺은 개인방송 진행자가 올린 동영상 중 한 장면. 남성 출연자가 양은 냄비에 소주 두 병을 콸콸 들이붓고 있다. 개인방송 진행자는 이 장면에 ‘박력’이라는 자막을 더했다.

또 다른 동영상에서는 남성 출연자 3명과 여성 출연자 4명이 폭탄주 게임을 즐긴다. 수위 높은 벌칙을 피하려면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한 번에 마셔야 한다. 술을 빨리 마시도록 하기 위해 벌칙의 강도는 점차 세진다. 출연자 두 명이 입술을 맞대도록 하거나 한 출연자가 다른 출연자의 배꼽에 입을 맞추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한 여성 출연자는 남성 출연자와 입술을 맞추는 벌칙에 걸리자 술 두 컵을 연거푸 마셨다.

수학여행 갈 때 술 숨기는 법을 알려주는 동영상도 있다. 한 개인방송 진행자는 수학여행 필수품으로 '술과 담배'를 권했다. “술을 가져가면 수학여행의 신이 될 것”이며 “인기스타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튜브에서 관련 검색어를 입력하자 비슷한 내용의 동영상 5개가 연달아 검색됐다. 술집에서 성인 검증 절차를 피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영상도 있었다.

▲ 유튜브 화면 캡쳐. 한 인기 개인방송 진행자가 올린 동영상 중 한 장면. 여성 출연자 두 명이 술 게임 벌칙으로 입술을 맞대고 있다.

자극적인 제목에 호기심, “지상파에서 못 보는 것 다 볼 수 있어요”

문제는 이러한 동영상들이 청소년에게도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개인방송 중 상당수는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술 게임을 하는 음주 방송이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별다른 제한 없이 음주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튜브에 가입하거나 로그인을 하지 않고도 검색과 시청이 가능했다.

김모(14)양은 유튜브에서 개인방송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다른 개인방송 플랫폼에서는 ‘19금’ 방송이어서 못 보던 영상들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김양은 “제목이 ‘19금’이나 ‘엄빠주의(엄마·아빠주의)’라고 쓰여 있어서 더 호기심이 생겼다”고 했다. 이유빈(17)양도 좋아하는 개인방송 진행자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다가 음주 방송을 처음 접했다. 이양은 “이제 개인방송 볼 때는 아예 시청 제한이 없는 유튜브에서만 본다”고 말했다.

송모(15)양은 한 개인방송 진행자가 올린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수학여행 갈 때 술 숨기는 법을 알았다. 송양은 “이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인기 급상승 동영상'이어서 친구들이 서로 돌려 봤다”며 “동영상에서 설명된 내용을 보고 따라한 친구들도 몇 명 있었다”고 말했다.

▲ 유튜브 화면 캡쳐. 개인방송 진행자가 방송 도중 수학여행 필수품으로 술과 담배를 권하고 있다.

청소년 중 일부는 오히려 음주 방송이 더 재밌다고 답했다. 술이 어색한 분위기를 완화하고 오히려 흥을 돋운다는 것이다. 김나연(17)양은 출연자들이 취기 오른 모습이나 평소보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좋아 술 먹방을 즐겨봤다. 김양은 “지상파에서는 못 보는 장면들이라 더 재밌었다”고 했다. 유튜브에서 게임 방송을 즐겨보는 서모(14)양은 “개인방송 진행자가 술에 취해 심한 욕설을 하면서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이 제일 재밌었다”고 말했다.

일부 음주 영상에서 '연출'되는 선정적인 장면도 ‘재미’의 일환으로 여겼다. 김성우(18)군은 유튜브에 올라온 술 먹방 영상 중에서 술 게임을 핑계로 출연자들이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들을 자주 봤다. 하지만 과히 눈살이 찌푸려지지는 않았다. 김군은 “술에 취하면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여성 출연자도 그렇게 불편해 하는 것 같지 않았다”며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학부모들은 걱정을 표했다.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오미나(48)씨는 유튜브에 19금 동영상의 성인 인증을 푸는 방법까지 설명돼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유튜브에는 가정에서 미처 가르쳐 주지 못한 온갖 내용의 동영상들이 수두룩하더라고요.” 오씨는 아직 중학생인 딸이 자극적인 방송을 보면서 술도 이상한 방식으로 배울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김정은(46)씨도 한창 수험생인 고등학교 2학년 딸이 개인방송을 즐겨본다며 한숨을 쉬었다. “방송 내용이 꽤나 자극적인데도 보지 않으면 아이들끼리 대화가 안 통한다고 하니 막을 수도 없더라고요.”

유튜브, ‘방송’으로 볼 수 있는 법적 근거 없어

유튜브에 음주 방송들이 난무하는 이유는 뭘까. 인터넷 방송에서 음주 행위를 규제하는 법안이 없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관계자는 “유튜브와 같은 인터넷 방송은 방송법상 '방송'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현행법상 음주를 소재로 방송하는 것을 규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음주 광고를 규제하는 국민건강증진법에도 인터넷 방송을 언급한 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문정림 새누리당 의원이 ‘인터넷 주류 광고’를 제한하는 법안을 제출했지만 논의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다.

국민건강증진법 시행령 제10조 2항에 따르면 종합유선방송을 포함한 텔레비전 방송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 사이 음주 광고를 금지한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사실상 하루 종일 음주 광고를 규제하고 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서도 금지되는 음주 광고들이 정작 파급효과가 더 큰 인터넷에서는 규제되지 않는 셈이다.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사이버범죄론을 강의하는 정완 교수는 “유튜브에 올라오는 개인방송은 사실상 텔레비전 방송과 다를 바가 없다”며 “청소년들의 접근이 자유로운 만큼 인터넷상에서 음주를 조장하는 내용이 무차별하게 확산되는 것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대로 따라하라’는 유튜브 인기 동영상, 영국·미국에서는 제재 필요성 제기

외국에서는 유튜브에서의 음주 장면 제재를 고심하는 분위기다. 2002년 이후로 술 관련 광고를 금지한 영국에서는 최근 들어 유튜브 동영상 속 음주 행위에 대해 심각성을 제기했다. 술과 담배를 연구하는 영국 연구소(UK Centre for Tobacco and Alcohol Studies)는 2015년 “영국의 10대들이 유튜브에서 음주를 조장하는 뮤직비디오에 지나치게 노출돼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조 크랜웰 연구원 외 2명은 12주 동안 유튜브에서 상위 40위권 안에 드는 뮤직비디오 32개 중 술의 상표와 이미지 등이 노출된 건수를 계산하고, 11살부터 18살 사이의 청소년 2068명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분석했다. 크랜웰 연구원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와는 달리 뮤직비디오는 거의 규제된 적이 없다”며 “인기 뮤직비디오에 술의 노출 빈도가 높고, 이것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적절한 규제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서에서 밝혔다.

미국 피츠버그 대학 연구팀도 유튜브에 올라오는 음주 동영상을 제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워싱턴 포스트가 지난해 2월 20일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이 대학 연구팀은 유튜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영상 70개에 나타난 음주 현상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인기 동영상 70개 중 79%에서 술을 이용해 분위기를 띄웠다. 술 마시는 게임을 하거나 술을 이용해 이성을 유혹하는 동영상은 각각 20%에 달했다. 브라이언 프리막 수석 연구원은 “동영상들이 공격성이나 상해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인데도 ‘이대로 따라해! 이대로 먹고 마셔!’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기사에서 말했다. 이어 “유튜브의 특성상 또래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줄 것”이라며 “더 강하고 현실적인 음주 제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3000명 이상 음주로 암 발생, ‘절주보다 금주’로 인식 바꿔야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3000명 이상 음주로 인해 암이 발생하고, 1000명 이상이 음주로 인한 암으로 사망한다. 지난해 3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음주 시작 연령은 16년 전에 비해 대폭 낮아졌다. 2015년 정신건강사업 안내에 따르면 아동과 청소년이 음주를 시작하는 연령은 2001년 17.1세에서 2014년 12.9세로 앞당겨졌다.

국내 전문가들도 인터넷에서 음주를 조장할 수 있는 내용을 제재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 음주 폐해 담당 사무관은 "한국은 여전히 술에 관대한 편"이라며 “절주로는 부족하다. 인터넷에서도 금주가 음주 문화 개선의 키워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유현재 교수는 “유튜브와 같은 인터넷 동영상 채널은 표현의 수단”이라면서도 “미성년자들의 음주 욕구를 부추길 수 있는 동영상 게재는 적극적으로 계도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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