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에 사는 중학교 2학년 김모 군(15)은 학교 숙제를 하다 ‘아빠가 불쌍하다’고 느꼈다. 방학 과제인 ‘부모 직업체험’을 하기 위해 가구 조립, 설치 일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하루 종일 고생했기 때문이다. 김 군은 담임교사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나는 무시당하고 폼 안 나는 직업을 얻기 싫다”고 적었다.

한편 같은 반 이모 양(15)의 보고서에는 “나도 나중에 커서 아버지처럼 회사에 다니고 싶다”라고 적혀있었다. 해외 바이어들과 일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더 높아졌다”고도 했다. 이 양의 아버지는 의료부문 유통회사의 대표이사다.

일부 초, 중, 고등학교에서 과제로 내준 부모 직업 체험 활동이 사실상 가정환경 조사로 변질돼 학생과 학부모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이 과제에서 학생들은 부모나 친지의 직장을 탐방 혹은 체험한 뒤 학교에 ‘직업체험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보고서에는 학생의 느낀 점뿐 아니라 직업인 인터뷰와 활동사진을 의무적으로 첨부해야 한다. 심지어 경기도 모처의 중․고등학교에서는 ‘월 평균 소득은?’ 혹은 ‘보수 및 만족도는 어느 정도 되나요?’ 등의 항목을 채우도록 했다.

▲경기도 오산시 S고등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직업체험보고서 양식. 체험 내용, 진로에 도움을 준 내용, 직업인 인터뷰, 인증 사진 등을 요구한다. 인터뷰 내용 중에는 ‘월 평균소득’을 묻는 질문이 있다.

과제가 수행평가 점수에 들어가거나 우수작을 시상․전시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적잖이 부담을 느낀다. 보고서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부모 직업이 다 드러나 급우들 간 위화감이 조성될 우려도 있다. 경기도 오산시에 사는 박모 양(19)은 동네에서 마트를 운영하는 부모님의 일손을 돕고 보고서를 작성해갔다. 박양은 “대학교수, 한의사, 국회의원 같은 직업을 체험하고 온 친구들을 보고 기가 죽었다”고 말했다.

학부모들 역시 고민이 많다. 실제로 학부모 이용자가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 ‘레몬테라스’, ‘82cook’ 등에 관련 불만을 토로하는 글과 댓글들이 올라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한 네티즌은 “남편이 고물상을 운영하는데, 사회적으로 선입견이 있는 직업이라 반 아이들에게 자녀가 놀림 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글을 올렸다. 그 아래는 남편 직장 이름을 ‘재활용 공장, 리사이클샵’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편부․편모 가정, 조손 가정 등의 학생 상황을 배려하지 않은 시대착오적 과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시 중구의 초등학교에서 근무 중인 김예진 씨(25)는 “학생들의 가족 형태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요즘은 부모님의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학생들도 드문데 체험 기회를 부모 직업에 한정해선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과제를 실시한 학교와 교사들은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경기도 지역의 중학교 교사인 신미경 씨(32)는 “학생들에게 진로탐색의 기회가 될 뿐 아니라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키우기 위한 취지다”라며, “교사가 아이들의 가정환경에 대해 알게 돼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후 상담 지도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편 교육부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과 함께 ‘진로체험 매뉴얼’을 개발해 일선 학교에 진로교육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 학교의 상황과 재량에 따라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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