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요? 저는 이런 얘기가 정말 싫습니다.” 
올해 대통령이 누가 될 거 같으냐는 물음에, 지난 2월 12일 오후 서울역 부근에서 만난 노숙인 A씨(65)는 ‘정말’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을 꺼냈다. “문재인. 그분이 그나마 유력한 분 아닙니까”라며 “그 분도 박근혜 대통령처럼 또 그러면 안 되죠”라고 덧붙였다. “우리 국민들은 잘해줄 거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실망했습니까”라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때론 울컥하는 마음에 눈가에 물기가 어리기도 했다. 그는 “문재인도 결국 힘 있는 사람이니까 정치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기성 정치인 전반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그 분이 좀 한번 잘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라며 희망을 내비쳤다. 같은 질문에 대해, 노숙인 B씨는 “박근혜가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내 “아무리 여자라고해도 그렇게 내쫓으면 안 되는 것이여”하며 탄핵정국에 대한 불만을 표했다. 이후 한참 다른 곳을 응시하며 말을 잇지 않았다. 침묵 끝에 그는 “대한민국이 통일이 되려고 해도 안 되는 게 거짓말만 해 쌌으니께...선진국이 되려고 해도 거짓말만 해 쌌으니께 안 되는 거여”라고 했다.

이들을 포함한 상당수 노숙인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자신만의 견해를 갖고 있다. 15년 넘도록 노숙인 재활사업에 관여해온 단체 '참좋은친구들'의 신석출 이사장은 "노숙인들은 죽일 놈, 살릴 놈 소리 섞어가며 정치에 대한 평을 재미나게 잘한다”고 말했다.

노숙인 투표 가로막는 현실 장벽
상당수 노숙인들이 정치에 관심이 많은 데 반해 이들의 참정권은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노숙인을 비롯한 거주불명 유권자 약 45만 명은 사실상 거의 투표를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관위에서 거주불명 유권자의 투표참여 현황을 샘플 조사한 결과, 18대 대선과 20대 총선의 투표율은 각각 0.19%, 0.16%였다.
주소지가 불분명한 유권자를 위한 제도가 마련돼 있기는 하다. 2009년, 주민등록말소제가 거주불명등록제로 대체됨에 따라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들도 마지막 거주지의 읍, 면, 동 사무소나 주민센터 주소를 통해 투표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투표권을 행사하기엔 현실적인 장애물이 적지 않다. 전라도가 고향이라는 노숙인 C씨(49)는 “투표하러 전라도까지 갈 이유가 없다”며 “내가 투표한다고 뭐가 나아지냐”고 반문했다. 
신석출 이사장은 노숙인들은 사실상 ‘투표할 엄두를 못내는 처지’에 있다고 했다. 선거 공보물이 주소지로 도착하는 일반 유권자들과 달리 노숙인들은 선거 공보물을 주민센터로 가 직접 수령해야 하는 등 투표 한번을 위해 보다 많은 ‘품’을 들여야 한다. 신 이사장의 말에 의하면, 노숙인 본인의 냄새나는 몸과 지저분한 모습에 대한 수치심도 투표를 가로막는 요소다.

이렇듯 노숙인들이 마주하는 실질적 장벽에 대해 진선미 의원은 꾸준히 목소리를 높여왔다. 진 의원은 지난 2014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국정감사 기간, “참정권 행사는 귀천이 따로 없이 평등하게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0월엔, 2014년 국정감사에서 이미 한차례 문제를 지적 받았던 선거관리위원회에 비판의 날을 세웠다. 선관위가 ‘거주불명자 투표율 제고를 위한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지난 20대 총선에서 서울역, 용산역, 인천공항 3곳에만 사전투표소를 설치하는 등 거주불명자의 투표 여건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 의원은 “선관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전투표소의 확대, 이동투표소 운영 등을 통해 투표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는 입장이다. 신 이사장 또한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노숙인들이 공동으로 투표할 수 있는 제도가 있으면 (적어도 대선에 있어서는)투표율이 지금보다는 올라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 진선미 의원이 2014년 국정감사장에서 제시한 노숙인 인터뷰 영상 캡처 화면. 진선미 의원실은 노숙인 20명과의 심층면접을 토대로 영상을 제작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지난 2월 15일 선관위 공보팀 관계자는 “정치 상황을 볼 때 언제 대선을 치를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선거관리나 사전투표소 설치 문제는 조금씩 준비하고는 있지만 아직 정확하게 나온 부분이 없다”며 “사전투표소도 많이 설치하면 좋은데, 설치 기준이 있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늘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투표 안내문 발송 등 홍보의 측면에 있어서도 “노숙인 분들이 한 곳에 거주하시는 게 아니라 계속 옮겨 다니시기 때문에 시설을 통한 홍보에도 한계가 있다”며 선관위만의 노력으로 해결하기 힘들다고 했다. 
 
거주불명자 참정권, 사회 전체가 책임 느껴야
해외 선진국에서는 거주불명자의 투표를 도우려는 사회 각 분야의 협력이 활발한 편이다. 진선미 의원실이 공개한 2015년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연구용역 보고서(거주불명자에 대한 선거참여 방안 연구)에 따르면 미국, 영국, 독일 등에서는 선거관련 헌법해석 및 법률개정을 통한 제도적 노력과 함께 시민사회의 조직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전국 노숙인 연합’(The National Coalition for the Homeless․NCH)은 대표적인 미국의 거주불명자를 위한 단체다. 이들은 1992년부터 “집이 없어도 투표할 수 있습니다(You Don’t Need a Home to Vote)”라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거주불명자의 유권자 등록 지원, 거주불명자에 불리한 법안 관련 소송 진행, 주와 연방법 개정 추진 등이 그 구체적 내용이다. 2004년부터는 “전국 저소득자와 노숙인 유권자 등록의 날(National Low Income and Homeless Voter Registration Day)”을 전국적으로 열어왔다. 워싱턴 D.C. 등 10개 주에서 거주불명자를 포함한 저소득층이 단체의 도움을 받아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있는 날이다. 또한 NCH는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세미나와 모임을 개최, 젊은 세대가 거주불명자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선거인명부등록제를 실시하고 있는 영국에서는 정부부처와 지역 홈리스 기관들의 협력이 눈에 띈다. 영국 중앙 선거관리위원회는 지역 홈리스 기관들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지역 노숙인들에게 선거인명부에 등록하는 방법을 홍보한다. 

언론이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독일 악셀 슈프링어 아카데미의 젊은 언론인 18명은 인터넷 플랫폼 ‘발로스(Wahllos)’를 만들었다. ‘왜 점점 더 많은 독일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가. 그리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기 위한 장이다. 노숙인과 거주불명자를 주요 대상으로 하지는 않지만 배제된 대상의 한 범주로서 다룬다. 발로스의 노숙인 섹션은 노숙인들의 투표참여의 어려움과 문제점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해당 연구용역 보고서 작성 업무를 담당한 서울시립대 이병하 교수는 “(거주불명자들은) 유권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여러 가지 제한이 많다”며 “평등권의 차원에서라도 이 사람들에겐 지원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교수는 “취약계층의 정치참여가 여타 장벽들로 인해 차단되고 있다면 개선돼야 할 문제”라고 했다. 그는 “거주불명자들에게 ‘내가 유권자’라는 인식을 부여하는 ‘역량증진(empowerment)’의 차원에서 (정치 참여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움이나 관련 홍보 부서의 정치 교육 프로그램 활성화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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