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15. 운 : 세상 하나뿐인


 

 



 

 

  MC 스나이퍼가 〈Gloomy Sunday〉의 우울을 실은 목소리로 날 위로한다. 그가 옆에 있다면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물어보고 싶다. 이봐, 진짜야? 지금처럼 세상이 발밑으로 꺼져 버린 거 같을 때에도 하늘은 언제나 내 편이란 말을 믿어야 되는 거야? 

  지금 막, 민우에게서 카톡이 왔다.
  “여친 만났음? 베프도 모르게 비밀 연애하는 친구, 생까려다 봐 줌!”
  마른하늘에 내리치는 날벼락을 맞는 기분이 이런 거지? 머리털부터 아킬레스건까지 순식간에 찌릿하게 전류가 흐르더니, 온몸에서 기분 나쁜 식은땀이 솟아난다. 여자친구? 비밀 연애? 이게 다 뭔 개소리야? 윽, 혹시! 눈앞이 뿌예진다. 손에 들려 빛을 내는 폰마저 흐려지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기차만이 이상한 현실감을 준다. 말 한마디 걸어오는 사람도 없는 썰렁한 서울역에서,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거친 삶의 파도가 덮칠 때마다 여기로 숨는 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부터 생긴 습관이다. 일단 찾아들면 폰이 노래를 멈춰야만 떠나는, 세상 하나뿐인 나의 피난처. 

 

 

 

 









  처음 여기 오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할아버지와 아빠, 엄마를 묻고 돌아오던 길… 아직 어리던 린인 온통 겁을 집어먹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또다시 쓰러진 할머니 곁을 지켰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할머니에게 치매가 올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인생이 내 어깨에 내동댕이친 삶의 무게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도망쳤다. 최고로 비겁한 놈이지, 나도 알아. 그래도 그때의 나는, 당장 다가올 밤조차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었다. 
  무조건 제일 빨리 떠나는 기차를 탈 생각이었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다. 되는 대로 타고 가다가 마음이 내키는 역에 내리면 그만이었다. 거기서 과거 따윈 잊고 닥치는 대로 살지 뭐, 안됨 말고. 근데 막상 차에 오르려 하자 땅에 강력 본드라도 발렸는지 발이 안 떨어졌다. 여기까지가, 내가 가족에게서 돌아설 수 있는 가장 멀리였던 거지. 어쩔 수 없이 밤새 승강장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텅 빈 철로만 바라봤다. 그때부터… 하릴없이 기다리며 살아왔다. 나를 둘러싼 시간이 강물처럼 꾸역꾸역 어떻게든 흐르기만을.
  하얀 국화로 장식된 아빠 영정의 무게는 오늘까지도 내 가슴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날부터 한순간도 떨칠 수 없었던, 이 집의 가장이라는 부담감처럼. 15살의 나에게는, 내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천벌과도 같았다. 형이나 누나가 있었다면, 아니 할머니만 제정신이라도 나았을 거야. 남편과 아들, 며느리를 한꺼번에 보낸 충격은 이해하지만, 할머니에겐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를 잃은 어린 우리가 있었잖아. 
  나는 시든 꽃처럼 부서지는 할머니를 무지하게 원망했다. 할머니가 혼자만의 세계로 훌쩍 내빼는 바람에 대신 내가 죽을힘을 다해 정신을 차려야만 했잖아! 쳇, 할머니가 린과 나를 버리고 달아나거나 죽어 버리진 않아서 그나마 고맙긴 해. 그랬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보육원으로 끌려갔을 거야. 거기서 사는 것 자체는 별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곳에 가면 린과 내가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자와 남자가 나뉘어져 생활하는 데다, 잘못하면 둘 중 하나만 입양이 될 수도 있다. 그럼 내가 동생을 지켜 줄 수가 없잖아? 그러다 평생 서로를 다시는 못 만날 수도 있어!
  난 이제 곧 17살이 되고, 1년 만에 키도 13센티나 급성장해서 겉보기에는 어른이나 다름없다. 이대로 별 탈 없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법적으로 성인이야. 그러니까 제발… 할머니가 지금처럼 하루 종일 아무 말 안 해도, 밥 같은 거 하나도 안 차려 줘도, 맨드라미만 죽어라고 쳐다보고 앉았어도 그때까지 우리 옆에 있어만 주면 좋겠다! 내게 제일 끔찍한 악몽은 그러기 전에 할머니가 죽는 거다.
 

  후아… 눈을 감자, 기억 속에서 향긋한 바람이 불어와 발아래 물살을 흔든다. 나는 어느새 청계천에 서 있다. 여기엔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했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루의 장사를 마친 할아버지와 아빠, 엄마의 손을 잡은 린과 나, 할머니… 우리 여섯 식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함께 웃고 떠들며 걷고 있다. 눈을 돌리자, 너무나 익숙한 우리 가게도 보인다. 맨드라미 꽃집. 촛불 맨드라미를 좋아하던 엄마가 지은 이름이다. 할아버지가 20년 전부터 하던 화분 가게를 이어받아 꽃집으로 바꾼 거라 단골도 많았고, 햇볕이 잘 드는 낙산 중턱에 방 3칸짜리 집도 있으니 그때의 우리는 남부러울 게 없었다. 나는 태권도 학원을, 린은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마냥 어리광을 부리던, 남들처럼 평범한 시절이었다.
  1년 전, 행복이… 모든 일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음을 알았다. 새벽에 꽃시장에서 돌아오던 아빠의 파란 트럭이 버스를 들이받으면서. 아빠의 졸음운전 때문이란 경찰의 조사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꽃을 가득 실은 트럭이 빨간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속도 그대로 버스 옆구리로 달려드는 블랙박스 영상까지 못 본 체 할 수는 없었다. 우리의 잘못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사고를 수습하느라 꽃집이 넘어가면서, 주먹을 꽉 쥐고 속울음을 삼키던 느린 침묵의 시간들… 그래도 그때까진 할머니가 정신을 제대로 잡고 있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 장례를 치르고 보험사와 싸우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상속 절차를 밟는 모든 일을, 중2의 나나 초등학생이던 린이 하기는 불가능하잖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마음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해야 할 일들이 사정없이 몰아치던 불행의 후폭풍 속에서도 할머니는 때로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없이 마당의 맨드라미를 바라보긴 했지만, 지금처럼은 아니었다. 후아,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날들이다! 
  야, 인마, 기운!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와. 빨리 민우한테 전화를 걸어서, 내 여자친구가 주황색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는지 물어봐야지! 이미 답은 알고 있지만.

  학교가 들킨 마당에 집까지 따라오는 건 일도 아니라고는 생각했어. 남방이 도대체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지만. 아니, 자기를 숨기려던 남방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집으로 찾아가 해결을 보려는 건지 모른다는 예상도 했지. 미안하게도, 우리집에는 뭔가를 책임져 줄 어른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 애로부터 비밀의 무덤을 지켜야 한다. 집에 경찰이라도 들이닥치면 무지하게 골치가 아프잖아? 그래서 일부러 적당히 겁만 주고 더스키돌핀 크루의 공연으로 떠들썩한 틈을 노려 따돌린 건데,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다. 
  윽, 2시간 넘게 머리를 굴려서 겨우 따돌렸다. 나름대로는 끝내주는 계획이라며 자신했다. 쳇, 나는 놈 위에 비행기를 타는 놈인지… 온실에서 자란 꽃 같던 첫인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보통은 가방 하나 도둑맞았다고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쫓아오진 않잖아? 학교에 이어 집까지? 기분이 좀 더러워도 어쩌다 개똥을 밟은 날처럼 운이 나빴다 생각하고 그냥 잊어버리거나, 하늘에 대고 욕하면서 나 같은 도둑놈한테 빌어먹을 저주를 퍼붓거나, 열받아서 도저히 못 참겠으면 경찰에 신고하거나 보통은 그런 거잖아!
  민우의 말을 들어 보면, 내 작전이 전혀 안 먹힌 건 아니다. 다음에 그 애가 어디로 튈지를 몰랐을 뿐이지. 쳇, 그러고 보면 인생은 정말로 알 수가 없어. 누구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우리는 순간순간 끊임없이 크고 작은 선택을 하지만, 그때 흔히 나만 생각한다. 눈에 안 보이게 나와 줄줄이 엮인 다른 사람의 머릿속과 그들이 고를 수많은 가능성을 모두 따져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지. 시간 차이를 두고 사슬처럼 연결될 등장인물이 누구누구인지 제때 알 수도 없는 데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결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이어질 결과에 대해서는 더 모르잖아? 그러고 보면 잘난 머리를 믿고 남을 꿰뚫는다며 인생에 계산기를 두드려 대는 인간은, 상황을 처음으로 되돌리거나 반대로 아주 꼬아 버리면서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지도 모르는 바보 꼴통이다! 신이 있다면, 인간들이 서로 뒤엉키며 빚어내는 요지경을 보며 매 순간 끝내주게 감탄하거나 무지하게 한숨을 내뱉고 있을 거야. 아님 말고.

  그건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남방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내 여자친구라며 민우를 꼬드겨서 우리집까지 알아냈잖아? 윽, 민우가 얼빠진 놈처럼 묻는 대로 술술 불지만 않았어도!
  “너라면 그냥 생깜? 내 여친이 날 걱정해서 간다잖앙!”
  녀석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나도 할 말이 없지만. 맞는 말이잖아? 그래도 오늘을 무사히 넘길 경우 있을지도 모를 다음을 위해서 쐐기를 박아 둔다.
  “진짜 여자친구라면, 그렇지.”
  “헐, 여친 아님?”
  “남방은… 내 스토커야.”
  “오, 마이, 갓! 어쩐지, 알려 주고 나서 뒤통수가 좀 싸했음. 쏘리, 브라더.”
  “걔 때매 요즘 무지하게 골치가 아파. 다음에 혹시 또 나타나면 바로 나한테 알려 줘.”
  “오브 코스, 맨! 돈 워리!”  
  어차피 일어난 일이라면 책임을 따지기보다 해결책을 찾는 게 나아. 집이 불타고 있는데, 어쩌다 불이 났냐며 묻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등신이지! 눈물이라도 쥐어짜서 어떻게든 급한 불을 끄고, 타들어 가는 물건을 하나라도 더 건진 뒤에, 차근차근 들여다보면 다시 살아갈 수 있어. 
  그럼 이제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러 간다. 세상을 향해 랩으로 총알을 날리는 힙합 MC가 불러 주는 우울한 일요일의 응원가를 들으며… 귓가에 무한 반복하다 보면, 그러다 보면 정말로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돌이킬 수가 없어도, 그래도 하늘은 내 편이라는 말을. 
  집으로 가기 위해 차갑게 식은 엉덩이를 든다. 언제나 느끼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건 바로 내 몸뚱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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