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지하철은 1974년 1호선이 개통되고 지속적으로 환경이 개선되며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출퇴근 시간대 평균 배차 간격은 3분, 칼 같은 정시도착, 인명사고 방지를 위한 스크린도어, 다음 열차 위치를 안내하는 전광판, 깨끗한 손잡이 등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 9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도쿄, 파리, 런던 지하철과 비교하면 43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시설만큼은 가히 세계 최고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에도 하루 800만 명이 오고가는 지하철 출입문 앞에서는 승객들 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적지 않다. 

5월 11일 아침 8시 3호선 오금행을 탔던 서채연(24)씨는 지하철에서 내리기 위해 진땀을 뺐다. 5~6명이 출입문 앞에 나란히 서서 승차객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구까지 나가는 공간이 좁아진 데다, 뒤에서 서로 내리겠다고 미는 승객들 때문에 넘어지지 않으려 중심을 잡고 앞으로 전진 했다. 참다못한 서씨가 출입문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내릴때 같이 내리고 다시 타달라"고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간신히 승강장에 내려 옷매무새를 고치려고 팔을 들어보니 팔 여기저기는 서있는 이들의 가방에 긁혀 빨갛게 부어올라있었다. 

지하철 출입문 앞에 서서 승하차시 비키지 않는 ‘망부석족’ 때문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대중교통 이용자가 늘고 있다. 망부석족이란 비좁은 열차 안에서 승객들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입구에 서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 때문에 하차하는 승객이 다치거나, 승차하는 승객이 불편을 겪는 경우도 다반사다. 

경증장애를 앓고 있는 신윤식(26)씨에게 지하철 환승역은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신씨는 양쪽 다리 길이가 달라 남들보다 걸음이 느리다. 그래서 지하철 안에 사람이 많아도 늘 천천히 하차한다. 그러다 몇 번이나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망부석족 때문에 출구가 좁아지면서 빠르게 내리려는 사람들이 뒤에서 밀쳤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자가 지난 2일 확인해본 결과, 열차 칸 중앙에서부터 5명의 망부석족이 있는 출입문을 빠져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총 38초였다. 망부석족이 없는 출입문을 빠져나가는 평균 시간은 10초 남짓이다. 신씨는 “아직도 기본적인 매너를 안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장애를 가진 입장에서 대중교통 이용은 어렵다”고 말했다. 

육아 휴직 기간 지하철을 주로 이용했던 김지은(32)씨는 한 살배기 아기와 다시는 지하철을 함께 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람이 덜 붐비는 오전 10시인데도 몇 번이나 지하철을 그냥 보냈기 때문이다. 바퀴의 회전반경이 큰 유모차이기 때문에 밀고 들어가기 까지 충분한 공간이 필요한데, 5~6명의 망부석족들이 문 앞을 막고 비켜주지 않았다. 큰 짐을 내려놓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유모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유모차 탑승이 가능한 전동차인데도 출입문은 이들 때문에 너무 좁았다. 겨우 지하철을 탔는데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하차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기 위해 출입문 앞으로 나가 미리 하차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있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안쪽 공간이 있어도 먼저 그 자리를 비켜주는 사람은 단 한명도 못 봤다”며 “인상을 찌푸리기 전에 서로 조금씩 배려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망부석족 때문에 울상이다. 올해 초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Maki yokota 씨는 망부석족 때문에 최종 목적지에 내리지 못했다. “excuse me(실례합니다)”를 외쳤지만 이어폰을 낀 망부석족들에게 들릴 리 없었다. 한국 사람들은 원래 이렇구나 생각했다.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안내사이트인 서울리스틱 (Seoulistic) 홈페이지는 서울 지하철에서 하차하는 방법으로 “무작정 팔로 밀치기”와 “그냥 쿨하게 넘기기(Be cool homie!)”를 제시하고 있다.

제도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일본 도쿄의 JR 오다큐센을 타고 가면 ‘車内の中程へお進み下さい‘(전동차 내 안쪽으로 들어가세요)라는 안내 방송을 모든 역마다 들을 수 있다. 캠페인도 활성화 돼 있다. 일본 후쿠오카시는 ‘승차매너 향상 협력선언’을 실시중이다. 후쿠오카시 지하철이 지하철 인근 학교와 협력해 학생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하철 매너를 교가와 함께 가사로 만들어 승강장에서 방송하는 방식이다. 후쿠오카 대학교의 학생들은 “문 부근에서는 타고 내리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행동합니다. 모두가 지키자, 승차 매너!”라는 가사의 노래를 만들었다. 미국 워싱턴에서는 지하철 출입문 앞 공간을 따로 표시해놓고 승하차 공간을 비워놓자라는 'don' block the box' 캠페인이 한 시민에 의해 제안됐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방송을 듣기 어렵다. 5월 16일 오전 7시 30분부터 8시 30분,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금정역에서 동대문역까지 총 22개 역을 거치며 들은 방송은 “안전하고 행복한 대한민국, 튼튼한 안보가 뒷받침 합니다. 국가정보원에서는 간첩·이적사범·국제범죄·테러·산업스파이·사이버안보위협신고·상담을 위한 111콜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동차의 출입문에 기대거나 손을 짚으면 다칠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내리고 타세요” “열차 출발 합니다” 가 전부였다. 안내방송 대신 들린 건 시민들의 고성이었다. 환승역인 신도림 역에서 한 중년남성은 “내리지도 않을 거면서 왜 거기서 있냐”고 망부석족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녁 9시 2호선 강남역 출입문은 3쌍의 커플이 애정행각을 하며 지키고 있었다. 70대 남짓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아무리 서로 좋아도 그렇지 거기 그렇게 서 있으면 사람들이 내릴 때 불편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제도적인 보완가능성에 대해 서울메트로 박상미 사원은 "승하차에 방해되지 않도록 출입문에 서 있지 말자는 메시지는 지하철 에티켓 홍보문안에 포함돼 있지 않다"며 “총괄적인 방송은 ‘백팩을 앞으로 메달라’와 ‘내리고 타라’ 정도다”라고 말했다. 제도적인 접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매일 안국역에서 여의도역까지 2번의 환승을 하고 출근하는 차아름(27)씨는 “지하철에서 내리려면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을 그냥 치고 내리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라며 “면적대비 이용객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제도가 개선돼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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