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대입구역 근처에 위치한 <세컨드> 작업실에는 다양한 영화 포스터가 붙어있다. (자료=이은경)

‘세컨드는 여성 캐릭터를 탐구합니다.’
최근 영화계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연기 도중 상대 배우를 성추행한 남배우A 사건 등 가시화되지 않았던 영화계 여성인권과 관련된 일이 공론화됐고, 페미니스트 영화인이 모인 ‘찍는 페미’와 같은 단체가 생겼다. 수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영화계의 실태에 대해 폭로하며 연대하고 있는 한편, 영화 서사 속에서 편협한 시선을 통해 그려지는 여성들을 주목한 비평지가 있다. 2016년 5월, 창간호 ‘납작한 여자’를 출간한 필름매거진 <세컨드SECOND>다. <세컨드>는 영화 속에서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주체적이고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분석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탐구한다. 1년 만에 2호 ‘여성의 힘’을 발간한 <세컨드>의 편집진 곽민해 씨(24), 장은진 씨(26), 정경희 씨(24)를 홍대입구역 근처에 위치한 <세컨드> 작업실에서 만났다.

#왜 ‘퍼스트’가 아닌 ‘세컨드’인가
제목 ‘세컨드’는 두 번째라는 뜻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남성에 가려져 늘 두 번째의 위치에 놓인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다. 이 밖에도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 장편영화보다 단편영화, 어른보다 아이 캐릭터 등 ‘주변부’를 조명해보자는 의도에서 <세컨드>는 탄생했다. 창간호의 제목이었던 ‘납작한 여자’는 영화 속에서 주변부로 소비되던 여성 캐릭터를 일컫는 단어다.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입체적인 캐릭터와는 반대로 평면적이거나 단면적인 캐릭터가 ‘납작한’ 캐릭터인데, 특히 여성 캐릭터는 ‘납작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영화 <검사외전>(2015)의 경우, ‘강동원 키스녀’로 더 잘 알려진 배우 신혜선의 캐릭터는 이름조차 없다. 그는 영화 서사에서 고학력자로 위장한 잘생긴 강동원의 캐릭터에게 반해 중대한 정보를 흘리고는 사라진다. 영화 어디에도 이 여성 캐릭터의 감정이나 내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여성 캐릭터들이 제작된 시대나 국가와 관계없이 수많은 영화 속에서 비슷하게 소비된다는 점이다. 정경희 씨는 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된다며 예시를 들었다. “모성애를 가진 엄마, 남성에게 성애화된 애인, 분노와 억울함을 안고 있는 피해자, 최약층의 약자인 소녀 캐릭터 등으로 정리돼요. 그 안에서 새로움을 추구할 수도 있지만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많았죠.” 이와 같은 캐릭터에 대한 비판이 <세컨드>의 주요 목적이다. 곽민해 씨는 이 밖에도 영화를 만드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다양하게 잡지 안에 담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영화과 없는 학교에서 영화를 꿈꾸다
<세컨드>의 시작은 이화여대 내의 자발적 소모임이었다. 인문대생인 장은진 씨는 영화과가 없는 이화여대에서 영화감독을 꿈꿨다. 인맥이 중요한 영화계 특성상, 비전공생이고 연고도 없는 그에게 촬영 현장이 녹록치 않았지만 일을 배우기 위해 현장에 열심히 나갔다.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연출한 첫 영화는 그의 페르소나를 그린 판타지였다. 그러나 결과물은 기대에 못 미쳤고, 그는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고민했다. 훌륭한 스태프와 배우를 동원했고 편집을 여러 번 하는 등 노력을 했으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한 장면만 놓고 보면 괜찮다는 평을 많이 들었는데, 그걸 붙여놓고 보니 영화가 아닌 거죠. 굉장히 낙담했어요.” 고민 끝에 찾은 실패 원인은 입체적이지 못한 ‘캐릭터’에 있었다. 장 씨는 이를 깨달은 순간 편집을 그만뒀다. 살아있는 캐릭터가 이끄는 서사구조가 없다면 영화를 살릴 수 없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지친 마음으로 학교로 돌아온 그는 학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영화를 깊이 공부할 사람을 모집했다. 연출을 하고자하는 사람들이 모여 시나리오를 쓰고 품앗이를 하며 영화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처음엔 참여 인원이 적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학교 내에서 영화 연출을 꿈꾸는 사람들이 점점 모였다. 모이고 보니 이들 모두가 각자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때 장 씨가 ‘우리의 활동을 기록해보자’고 제안했고, <세컨드>가 탄생했다.

#‘캐릭터’에 대한 고민, 그리고 ‘여성’
잡지의 중심 주제에 대해 여러 제안이 있었지만, 고심 끝에 ‘여성 캐릭터’를 주제로 선정했다. 인위적이지 않고 공감 가는 캐릭터, 특히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의 구현은 각자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끊임없이 했던 고민의 핵심이기도 했다. 정 씨 역시 본인의 시나리오에서 조연 캐릭터들은 ‘여성 캐릭터’의 전형적인 행동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질투하는 여자애나 시끄럽게 떠드는 여자애처럼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봐왔던 애들이 다 동원됐어요. 제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많이 답답했어요. 이 주제가 나오기까지 각자의 목마름이 있었던 거죠.” 

▲ 지난 5월 출간된 <세컨드> 2호 ‘여성의 힘’ 표지와 내부의 모습이다. (출처= 텀블벅 ‘세컨드 필름매거진’ 페이지)

이들은 여성캐릭터에 대한 논의가 단순히 평면적인 캐릭터에 대한 비판에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 캐릭터에 대한 비판을 주로 담은 창간호 ‘납작한 여자’ 이후 많은 고민을 거쳐 지난 5월 2호 ‘여성의 힘’을 출간했다. ‘여성의 힘’은 주로 피해자나 약자였던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으로 서사를 이끌어갈 때 느꼈던 힘을 찾아보자는 의미에서 지은 제목이다. 2호를 준비하며 이들은 여성의 힘을 하나로 정의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 또한 편견의 재생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를 볼 때 여성 캐릭터로부터 느끼는 힘을 찾았다. 그리고 힘의 근원에 있는 다양성을 최대한 보여주고자 했다. 그 결과, 범죄자와 피해자로 이분화되지 않은 여성캐릭터를 보여준 <비밀은 없다>(2015), 이타적인 힘을 보여준 <죽여주는 여자>(2016), 어린 여성을 온전히 인간으로 다룬 <우리들>(2015), 악녀가 아닌 여성 악당의 힘을 보여준 <나를 찾아줘>(2014), <미저리>(1990) 등 다양한 영화가 2호에 등장했다. 

#‘독립 잡지’로서의 <세컨드>가 나오기까지
창간호가 나오기까지 1년 이상이 걸렸다. 편집진들 모두 <세컨드>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다른 일을 병행했다. 결국 <세컨드> 일을 잠시 내려놓는 편집진도 있었다고 한다. 장 씨는 주변에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본인은 너무 힘들었다고 밝혔다. “두 일을 같이하며 계속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경계에 서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잡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도 쉽지 않았다.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영화 현장에 반하는 의미에서 느린 민주주의와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지향했다. 만장일치제로 회의를 진행해 회의 시간이 5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일은 다반사였다. 특히 창간호를 만들 당시엔 편집진들이 직접 글도 썼기 때문에 각자 글에 대한 욕심과 타협해야했다. 2호에서는 이를 수정해 편집진과 필진을 나누고, 디자이너 인원도 늘리는 등 체계를 갖춰나갔다. 곽 씨는 <세컨드>가 아마추어 잡지처럼 보이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만듦새에 특히 신경을 썼다고 덧붙였다. 

▲ 텀블벅 후원 리워드로 제공되었던 영화감상노트(좌), 벡델 테스트 포스트잇(우). 영화감상노트에는 영화 산업 내에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고
성적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고안된 등급 분류 기준인 F-Rating을 별점 대신 기록할 수 있다. 벡델 테스트는 3가지 기준을 통해 영화 성평등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테스트며, 포스트잇에 이 기준이 기재돼있다. (출처=텀블벅 ‘세컨드 필름매거진’ 후원 페이지)

출판 비용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을 이용해 마련했다. 이들은 크라우드 펀딩의 리워드(후원자에게 답례로 주는 상품) 하나에도 신경을 썼다. 대중들이 후원을 결정하는데 있어 리워드 상품의 영향도 크기 때문이다. 스티커, 엽서, 뱃지 같은 형식적인 상품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상품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실제로 영화를 감상하며 사용할 수 있는 ‘영화감상노트’와 ‘벡델 테스트 포스트잇’을  만들었다. 이렇게 준비한 2호의 크라우드 펀딩은 목표금액이었던 600만원의 두 배에 가까운 후원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끝났다. <세컨드>의 후원은 현재 마감된 상태며, 1호와 2호는 ‘노말에이', '공상온도', '퇴근길책한잔' 등 전국 13개 독립 서점에 입고돼있다. 

#<세컨드>를 만들며 느낀 여성 간의 연대
창간호를 만들던 당시는 불과 1~2년 전이었음에도 지금과 달리 페미니즘 컨텐츠가 적은 시기였다. 정경희 씨는 여성의 입지가 거의 없는 영화계에서 페미니즘 비평지를 만들기가 두려웠다고 회고한다. 그런데 창간호가 출간된 이후 그 두려움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페미니즘 잡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 ‘문화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수많은 신생 페미니즘 단체 등 많은 움직임들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 두렵지 않았다고 느꼈죠.” <세컨드>를 만들며 가장 좋았던 순간에 대해 장은진 씨는 창간파티를 언급했다. “영화과 여성분이 잡지 뒷면에 있는 ‘세컨드는 여성 캐릭터를 탐구합니다.’라는 문구를 읽었을 때 눈물이 났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이 잡지가 너무 좋았고 감사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얘기를 듣고 저도 눈물이 났어요.” 잡지에 대한 후기 역시 따뜻한 반응이 많았다. 비판을 받더라도 공격적이거나 무분별한 비판은 한 번도 받은 적 없다. 정 씨는 ‘2호를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내달라’는 기분 좋은 질책은 종종 받았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이렇게 느꼈던 연대감은 잡지를 만들 때 은연중에 큰 힘이 됐다.

#여성 영화의 흐름 속에서
편집진들은 처음 <세컨드>를 만들 때부터 탁상공론은 지양하자고 약속했다. 여전히 연출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영화계에 다양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싶었다. 특히 장 씨는 촬영 현장에 나갔을 때 주위에 여성 영화인들이 많이 있길 바랐다. 잡지 속 글쓴이 ‘장은진’으로 남긴 싫었다. 그가 잡지를 1년에 한 권씩만 만들며 영화 상영전 등의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는 이유도 이 행사가 여성 영화인들의 만남의 장이 되길 원해서다. 정 씨도 비슷한 생각이다. <세컨드>를 준비하는 1년 동안 현장에 다녀오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돌아와 글을 쓰길 반복하며 깊이 있는 컨텐츠를 기획하고자 한다. 그는 지난 해 편집진들이 기획한 ‘여자사람 단편영화 상영전’을 언급하며 이를 통해 잡지 컨텐츠에 긍정적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잡지의 컨텐츠 또한 영역을 넓혀나가고 싶다고 밝혔다. “촬영 기법이나 영화 미술에도 페미니즘적인 방법들이 있는데, 이걸 좀 더 자세히 다뤄보고 싶다”며 연출과 영화 산업 전체에 대한 논의로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페미니즘 영화사의 계보를 만들어 보는 계획도 있다고 덧붙였다.

‘연고도 없는 비전공생들’이 생업과 병행해가며 페미니즘 영화 비평지를 만드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컨드>를 계속해서 만드는 이유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연출자로서 시작했던 시나리오와 캐릭터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컨드>는 격변하는 페미니즘 문화와 영화계 속에서 단순히 ‘비평’만 하는 잡지로 남길 원치 않는다. 그들의 영역이 확장돼, 수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연대하고 함께 작업하는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영화계에 다양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원한다. 2년에 걸쳐 출간된 두 권의 세컨드는 이들의 이러한 고민의 일부다. 영화 속에서도 밖에서도 언제나 비주류였던 여성이 더 이상 비주류로 취급받지 않을 그 날까지, 세컨드의 행보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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