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 3개를 돌돌 말아 배 위에 얹었다. 복대로 단단히 고정을 시킨 뒤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펑퍼짐한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임산부 배지’를 단 가방까지 매고 거울 앞에 서니 영락없는 7개월 차 임산부의 모습이었다.

▲ 임산부 분장을 한 기자의 모습
▲ 기자의 가방에 임산부 배지를 달았다

주말 오후 경의중앙선. 등산객들로 지하철은 이미 만원이었다. 임산부 배려석에도 등산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기자가 그 앞에 섰지만 옆에 앉은 지인과 이야기하기 바쁜 그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등허리에 손을 짚고 “아유, 아유”하며 한숨을 쉬자 그때서야 기자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두 남성 모두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았다. 4개의 역을 지나 목적지에 다다른 남성이 일어났고 기자가 그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드니 기자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젊은 여성이 남성에게 눈을 흘기고 있었다.

평일 오후 4호선 임산부 배려석에는 60대 여성이 앉아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유투브 동영상보기에 푹 빠진 그녀에게 왜 여기에 앉아 계시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임산부 배려석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맞은편으로 자리로 옮기고 나서도 기자를 향해 “난 진짜 몰랐어. 미안해요”를 다섯 번 이상 반복했다. 4호선의 다른 임산부 배려석은 한 외국인 남성 차지였다. 함께 있던 외국인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에게도 이 자리가 임산부를 위한 자리인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알고 있는데 당신(기자)이 임산부인지 몰랐다”며 벌떡 일어나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다른 날에는 기자의 남성 지인과 부부인 척 하며 지하철을 함께 누볐다. 남편과 함께 다니는 임산부라면 자리를 더 쉽게 양보 받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기자의 배는 여전히 ‘임신 7개월 차’인 상태였고 임산부 배지를 단 가방은 기자의 ‘남편’이 맸다.
3호선 일반 좌석에 앉은 여성 앞으로 다가갔다. 20대로 보이는 여성은 기자와 기자의 남편을 반복해서 번갈아 쳐다봤다. 흔들리는 눈빛에서 그녀의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기자가 남편을 바라보며 “나 진짜 허리 아프고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자 여성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에 보형물을 넣지 않고 평범한 일상복을 입은 채 지하철을 타면 자리를 양보받기가 더 어려웠다. 가방에 임산부 배지를 달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에 바빠 배지를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2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한 남성도 스마트폰으로 웹 서핑에 한창이었다. 5분 정도 앞에 서 있다가 아무래도 앞을 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말을 걸었다. “제가 아이를 가져서 힘들어서...” 그러자 남성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을 건 기자가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잠시 뒤 기자가 임산부 배려석에서 일어나자마자, 또 다른 중년 남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바로 옆 칸에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남성이었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아이돌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매우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 앞에 잠시 서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중년 여성이 기자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자 중년 여성의 남편으로 보이는 이가 대뜸 “왜 자리를 비켜주냐”고 했다. 여성이 “임산부잖아”라고 말했지만 남성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무슨 임산부냐”며 기자를 훑어봤다. 여성이 기자의 가방에 달린 배지를 가리키며 “임산부잖아!”라고 한마디 더 하고 나서야 남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년 여성에게 감사하다고 하자 그녀는 “저 총각이 떡하니 앉아 있어서 그랬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귀에 꼽힌 이어폰 때문이었을까. 이 작은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그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2호선 지하철이 강남역에 가까워지자 통로를 지나다니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아졌다. 배지가 더 잘 보이게끔 어깨에 맸던 가방을 아예 앞으로 맸다. 일반 좌석에 앉은 한 중년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는 눈을 감았다. 껌은 부지런히 계속 씹으면서 눈만 꼭 감고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해봤다. “산부인과 가서 검사받고 집에 가는 길인데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 집까지 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어떡하지...” 그러나 눈을 감은 중년 여성을 포함해 자리를 비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일에 걸쳐 경의중앙선과 1~4호선, 7호선을 돌아봤다. 기자가 확인한 60개의 임산부 배려석 가운데 비어있는 좌석이 14개, 사람이 앉아있는 좌석이 46개였다. 이 중 가임기 여성이 아닌 사람(남성 또는 여성 노인)이 앉아있는 경우가 24번이었다. 배에 보형물을 넣었을 때와 넣지 않았을 때를 모두 포함해 기자에게 자발적으로 자리를 양보해준 시민은 4일 동안 단 3명이었다. 2명은 여성, 1명은 남성이었다.

▲지하철 2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한 남성이 앉아있다.
▲지하철 1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한 남성이 눈을 감은 채 앉아있다.

자리를 양보 받고 못받고의 문제를 넘어선 차원의 사건도 있었다. 4호선 이촌역에서였다. 임산부 배려석에 70대로 보이는 여성이 앉아있었다. 기자가 그 앞에 서자 노인은 바로 자리를 양보해줬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순간 노인이 “근데 꼭 늙은이 앞에 그렇게 서 있어야겠어?”라고 말했다. 노인은 다른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젊은 여성을 가리키며 “저기 앞에 가면 되지. 굳이 늙은이 앞에 서 있어야만 했냐”고 했다. 노인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지길래 기자가 물었다. “어머니 제가 뭘 잘못했나요?” 노인은 말했다. “배는 그렇게 불러 가지고 늙은이 앞에 떡하니 서 있는 게 잘못이지 뭐야!”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혼잣말로 비난을 이어갔다. ‘미친X’이라는 욕설이 들렸다. 기자가 “어머니”하고 부르자 노인은 휙 돌아섰다. 반대편 차창에 계속해서 기자를 노려보는 노인이 비쳤다. 배 안에 수건 석 장이 아니라 실제로 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잠시 아찔해졌다. 

임신 12주차 임산부 서가현(19)씨도 얼마 전 지하철에서 한 노인에게 ‘막말’을 들었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서 씨에게 한 남성 노인이 다가와 “어린 학생이 거기 앉아있으면 되냐”고 말한 것이다. 서 씨가 임신 중임을 밝히자 노인은 “요즘 애들이 발랑 까져서 사고나 치고 다닌다”고 했다. 서 씨는 “이럴 때마다 한마디 하고 싶지만 배 속의 아기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화도 못 낸다”고 말했다. 이제 서 씨는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보건소에서 받은 ‘임산부 거울’을 손에 꼭 쥐고 있는다.

지하철에서 임산부들은 심지어 폭행의 위험에 시달리기도 한다. 작년 9월 4호선에서 70대 남성이 임산부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젊은 게 왜 노약자석에 앉아있냐’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남성은 임신 사실을 확인하겠다며 임산부의 옷을 걷어 올리기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다양한 캠페인이 진행됐다. 광운대학교 공공소통연구소는 임산부 배려석에 곰돌이 인형이나 방석 등을 올려둬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비워놓는 운동을 펼쳤다. 또 임산부가 배지를 다는 게 아니라, 임산부가 아닌 사람이 배지를 달자는 캠페인도 있다. 이 배지에는 ‘나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겠습니다’라고 적혀있어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자는 취지다. 현재 아이디어를 낸 일반 시민의 주도로 크라우드 펀딩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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