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 수호자, 디지털 혁신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전 편집국장 알란 러스브리저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1995년, 그는 42세의 나이에 <가디언> 기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편집국장 자리에 올랐다. 2015년까지 무려 20년간 편집국을 진두지휘했다. 2016년 5월 13일 <뉴욕타임스> 미디어 면에 보도된 기사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동시대를 살아간 언론인 중 가장 훌륭하다고 칭송받는 기자 중 한 명”이다. “중견 규모의 영국 일간지를 세계적인 디지털 미디어 거인으로 성장시킨 혁신가이며, 거대 폭로 기사를 쌓아올린 특종의 달인이다.” 

▲ 알란 러스브리저의 가디언 은퇴 후 모습이다. (출처 : 러스브리저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arusbridger)


언론자유의 수호자
2013년 6월 5일 <가디언>에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미국의 국가 안보국 NSA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자국민 수백만명의 전화통화와 이메일을 감시했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4년 전 런던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영국의 정보국인 GCHQ가 다른 국가 정상들의 통화내용을 도청했다는 사실도 담겨있었다. 거대 정치 스캔들 특종이었다.

18년차 편집국장이었던 러스브리저는 NSA의 계약직 직원이었던 내부 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씨로부터 비밀 내부문서를 입수했다. 러스브리저와 가디언 기자들은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무분별하게 시민들을 도청하고 감청한 사실을 시리즈 기사로 보도하기로 결정했다. 반응은 예상대로 거셌다.

영국 정부는 가디언이 도난당한 정부 문서를 불법적으로 소지하고 있다고 압박했다. 미국과 달리 영국은 언론을 정부로부터 지켜줄 수정헌법 제1조(First Amendment)가 없다. 첫 기사가 나가고 보름 뒤 정부 인사들이 러스브리저의 사무실을 찾았다. 2013년 9월 7일자 <뉴요커>에 실린 기사를 보면 당시 현장 분위기가 어땠는지 느껴진다.

2013년 6월 21일 아침 8시 반. 러스브리저가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창문으로는 운하가 내려다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정부 인사 두 명이 그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데이비스 캐머런 총리의 내각장관인 제레미 헤이우드씨와 홍보국장인 크레이그 올리버씨였다. “당신과 가디언이 하고 있는 일을 총리님과 부총리, 외무장관, 법무장관 그 외 많은 장관들이 극도로 우려하고 있습니다.” 헤이우드 내각장관의 목소리가 강철같이 차가웠다고 러스브지러는 회상했다.  

내각장관과 홍보국장이 떠난 지 정확히 8시간 후에 러스브리저는 편집국에 지시를 내렸다. “영국 정보국 GCHQ의 비리사실을 기사화하고 웹사이트와 신문지면에 보도합시다.” 

러스브리저와 함께 일했던 <가디언>의 기자 닉 데이비스는 러스브리저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에게는 두 개의 얼굴이 있습니다. 어떤 뉴스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이 담긴 얼굴. 그리고 또 하나는 부드러운 외모 덕에 어떤 취재원과도 협상할 수 있는 외유내강의 얼굴입니다.”  2015년 러스브리저가 편집국장직에서 내려오고 만들어진 그의 자전적 영상인 <헤드라인 속의 인생>에 등장한 데이비스의 말이다.  

영국 정부와 정보기관의 압력은 계속됐다. <가디언>이 보도를 그만두지 않자 헤이우드 내각장관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어떤 신문도 국가 비밀문서를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문서를 돌려주세요.” 헤이우드 내각장관과의 일화는 2013년 9월 7일자 <뉴요커>의 <정보의 자유 ( Freedom of Information)>라는 기사에 자세히 소개돼있다. 당시 내각장관은 만약 가디언이 에드워드 스노든 문건의 보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법원의 금지명령과 체포영장을 받아올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몇 달간 정부의 압력을 견디던 러스브리저는 결국 스노든 파일이 저장된 하드웨어를 GCHQ 요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파쇄한다. 정부에 넘겨주느니 스스로 없애버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보도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보장받는 미국 신문사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비영리 인터넷 언론사인 <프로퍼블리카>에 NSA 문건을 제공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해외 신문사를 통해서라도 NSA 문건을 계속 보도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다. 특종을 두고 경쟁하는 타 신문사와 협력도 불사하는 러스브리저의 결단력에서 언론 자유의 수호를 위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NSA 내부문건 보도 이후 <가디언>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정점을 찍게 된다. <디 애틀랜틱>에 의하면 NSA 보도가 나가기 전인 2013년 5월에 <가디언> 사이트 방문자 수는 월 4천만 명을 기록해 <뉴욕타임스> 다음이었다. 한 달 뒤 에드워드 스노든이 <가디언>에 자신의 실명을 공개한 직후 <가디언>의 하루 방문자 수는 무려 700만 명에 달했다. 일 년 뒤 <가디언>은 NSA 내부문건 보도로 공공서비스 부문에서 201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가디언>은 영국 일간지 중에서도 진보 성향의 신문으로 알려져 왔다. 정부와 기득권을 비판하는 기사들이 <가디언>의 트레이드마크다. 러스브리저가 지휘하는 20년간 <가디언>은 NSA 내부문건 보도 의외에도 영국을 떠들썩하게 한 특종을 여럿 터뜨렸다. 

2009년,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영국 타블로이드지 <뉴스 오브 더 월드>가 경찰을 매수해 연예인, 정치인, 그리고 로열 패밀리의 핸드폰을 해킹했다는 기사가 <가디언>에 실렸다. 당시 아무도 루퍼트 머독의 기사를 다루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러스브리저는  그의 자전적 영상인 <헤드라인 속의 인생>에서 털어놨다. <뉴스 오브 더 월드>는 한때 일요일판 신문 중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내던 신문이었고, 루퍼트 머독의 영향력은 미디어 산업에서 막강했다. 그런 러스브리저 편집국장을 두고 닉 데이비스 기자의 평이 <헤드라인 속의 인생>에 등장한다. “러스브리저는 겁이 없다. 강한 압박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는다. 그는 많은 편집국장들이 갖추고 있지 못한 독특한 자질을 가졌다. 그게 그를 이루는 근간이다.” <가디언>의 보도 이후 <뉴스 오브 더 월드>는 얼마 못 가 폐간됐다.

2010년에 러스브리저는 위키리크스로부터 비밀문건을 입수했다. 미국, 영국 그리고 여러 국가의 외교관들이 나눈 비밀 대화가 담긴 다량의 외교전문이었다.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 일어나는 잔혹 행위가 세세하게 담겨있었다. 러스브리저는 보도를 거부했던 줄리안 어산지를 만나 끈질기게 설득했고 또 하나의 특종 기사를 성공시켰다.

이런 기사들은 가디언과 러스브리저의 정체성이 됐다. 권력기관을 감시하고, 두려움 없이 보도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지금의 <가디언>은 전 세계 영어권 국가들에 있는 좌파성향의 독자들을 사로잡는 명성 있는 신문사가 됐다.

▲ 알란 러스브리저의 가디언 은퇴 후 모습이다. (출처 : 러스브리저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arusbridger)


과감한 디지털 혁신가
<가디언>의 시작은 미약했다. 1821년, 영국의 작은 도시 맨체스터에서 창간됐다. 지역 상인들이 만든 주간지였다. 그로부터 50년 뒤인 1872년 CP 스콧이 편집국장이 되고 그가 가디언을 샀다. 57년간 소유하면서 <가디언>만의 진보적인 색체를 만들어나갔다. 1936년 그의 아들 테드 스콧이 <가디언>의 현재 소유 재단인 스콧 트러스트(Scott Trust)를 세웠다. 1964년, 창간 된지 약 90년 만에 <가디언>은 맨체스터를 떠나 런던으로 옮기며 영국의 대표 일간지로서의 자리를 확립해나가기 시작했다.

러스브리저는 1953년, 과거 영국령이었던 아프리카 남부국가인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맥들린 컬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방학동안 <케임브리지 이브닝 뉴스>에서 인턴기자로 일했다. 1979년 졸업 후에 바로 정식 기자로 입사했다. 

러스브리저가 <가디언>에 글을 쓰기 시작한 건 1985년이다. <가디언>의 편집국장들 눈에 들었다. 권력을 풍자하는 기사가 깊은 인상을 줬다고 한다. 칼럼니스트로 스카우트 된 러스브리저는 능력을 인정받아 <선데이 옵저버>에 텔레비전 비평가로 초빙됐고, 9개월 뒤에 <데일리 미러> 워싱턴 지부 국장으로 초빙됐다. “이때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워싱턴에 있으면서 미국 저널리즘에 눈을 뜬 셈이다” 워싱턴에서 생활하면서 저널리즘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전까지 뉴욕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미국 기자들은 취재윤리에 대해 토론하고 규칙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었는데, 영국에서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2014년 9월 7일, 뉴요커에 보도된 <정보의 자유>기사에서 러스브리저가 밝혔다.

그는 1992년에 <가디언>으로 되돌아왔다. 2년 뒤 피처기사 에디터로 발탁됐고, 1년 뒤 <가디언>의 재단인 스콧 트러스트와 기자들의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편집국장직에 올랐다. 1995년의 <가디언>은 지금의 <가디언>과 같은 명성을 누리던 때는 아니었다. 중견 규모의 회사였고, 충성 독자도 많지 않았다. <가디언>은 러스브리저의 아래에서 크게 성장했다. 문화 비평 기사를 대폭 강화해 젊은 독자를 확보했다. 기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기 편한 신문인 ‘베를리너 판’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러스브리저의 가장 혁신적인 시도로 꼽히는 일은 ‘디지털 퍼스트’ 전략이다. 스마트폰이 나오기도 전인 1995년에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디지털 퍼스트를 선언했다. 1994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실리콘 밸리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깨달았다. 신문의 미래는 인터넷이라고 말이다.

디지털 퍼스트를 위한 러스브리저의 인사 과정도 인상적이다. <더 옵저버 비즈니스>의 에디터였던 에밀리 벨이 2013년 9월 7일자에 보도된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러스브리저와의 인연을 소개했다. 1999년 그녀는 우연하게 러스브리저와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고 한다. 식사 도중 그녀는 러스브리저의 디지털 전략을 비판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가디언>의 웹사이트 변화들은 충분치 않다. 더 적극적이고 더 공격적으로 온라인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2년 뒤, 그녀는 <가디언> 웹사이트를 온라인 신문사로 바꾸는 일의 책임자로 스카우트됐다.

지금 가디언은 전 세계에서 1억 명 이상이 매달 홈페이지를 방문할 정도로 세계적인 디지털 미디어로 성장했다. 매일 28만 명의 디지털 독자들이 가디언을 찾는다. “뉴욕타임스는 유료화라는 높은 장벽을 온라인에 세웠다. 하지만 가디언은 그 정반대다. 누가 더 미래를 더 잘 판단했는지는 10년이 지나면 드러날 것이다.” 2015년 5월 16일, 편집국장직을 떠나면서 러스브리저가 남긴 고별기사에 적힌 구절이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로 남은 전직 편집국장
러스브리저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 애호가였다. 57살의 중년의 나이가 돼 다시 피아노를 시작했다. 그의 저서인 <다시 피아노(Play It Again)>를 보면 편집국장직을 지내면서 틈틈이 피아노를 연습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러스브리저는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한 쇼팽의 ‘발라드 1번’ 연주회를 보고 크게 감명 받았다고 한다. 그후 1년 안에 발라드 1번 연주를 해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공교롭게도 그후 1년은 러스브리저 인생의 가장 바쁜 해였다고 한다. <위키리크스>와 <뉴스 오브 더 월드> 특종들이 터졌다. 일본 동북부 대지진, 아랍의 봄과 같은 세계적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보도 경쟁 속에 발라드 1번을 연습하는 자신의 모습을 녹였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리오넬 바버 기자는 뉴요커의 켄 아우레타 기자의 기사에서 러스브리저의 쇼팽 고군분투기에 대해 평한다. “러스브리저가 쇼팽 악보를 연습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건 마치 ‘나는 몇 시간씩 쇼팽을 연습할 수 있는 준비가 돼있다. 그만큼 나는 몇 날 몇 시간씩 뉴스를 들을 준비가 돼있다’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2013년에 편집국장직에서 내려온 러스브리저는 <가디언>을 소유하고 있는 스콧 트러스트 재단에서 일한다. 2016년 9월에는 재단의 의장직을 맡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2016년 5월 13일 평생 업적을 바쳤던 <가디언>에서 나온다. 불어난 재정적 손실이 러스브리저와 재단 사이의 불화를 만들었다고 뉴욕타임스는 2016년 5월 13일자 기사인 <알란 러스브리저 한때 가디언의 유명 편집국장, 가디언과 관계를 끊다>에서 전했다. “내가 편집국장직에서 내려오고 나서 세상이 많이 변했다. 우리는 현재 디지털 허리케인 속에서 저널리즘을 하고 있다. 재단은 새로운 의장을 원했고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한다.” 이는 러스브리저가 가디언을 떠나며 보도국의 직원들에게 남긴 노트 중 일부다.

2017년, 그는 현재 옥스퍼드 대학의 여자 칼리지인 레이디 마거릿 홀 대학의 교장으로 있다. 영국 국립청년관현악단과 런던 사진작가 갤러리의 의장이기도 하다. 3권의 어린이 동화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면서, 베토벤 연극의 극작가이기도 하다.

가디언의 탐사보도 에디터였으면서 동시에 러스브리저의 처남인 데이비드 레이 기자는 러스브리저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비유하자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오리 같다. 위에서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 마냥 보이지만 사실 물 아래 속 다리는 미친 듯이 노를 젓고 있다.” 20년을 살얼음판 같은 보도 경쟁 속에서 신문사의 편집국장을 지냈고, 미디어의 디지털 파도를 온몸으로 맞았던 러스브리저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아닌가 한다. 지금은 언론계를 떠났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신문사와 기자들에게 아직도 유효하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