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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차 간호사 정서윤 씨(31)는 얼마 전 미국 이민을 결심했다. 힘든 근무환경과 환자들의 태도 때문이다. 정 씨는 휴대폰으로 12월 일정을 꺼내보였다. 간호사 3교대에서 낮 근무를 뜻하는 ‘D(Day)’, 저녁 근무를 뜻하는 ‘E(Evening)’, 밤샘근무를 뜻하는 ‘N(Night)’로 달력이 빽빽했다. “원래는 15일 정도 오프(Off, 휴일)인 게 정상이죠. 근데 크리스마스 포함해서 9일밖에 없어요.” ‘아가씨’, ‘언니’로 부르며 하대하는 환자들의 태도도 견디기 힘들었다. 정 씨는 지난 7월 미국에 한 달 간 머물면서 이민에 대한 생각이 확고해졌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제일 부러웠어요. 지하철에서 간호사들이 수술복을 입고 출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1년만 버티라고 해요, 딱 1년만.” 이화여대 간호학과 박소은 씨(21)가 간호사 선배들에게 들은 조언이다. 4년을 공부해 1년도 못가는 직업. 한국의 근무 환경이나 인식 등을 고려해 박 씨는 일찍이 미국 취업을 결정했다. 그의 주변에도 비슷한 학생들이 많다. 해외취업을 준비하는 간호학과 동아리도 있다. 박 씨가 한국에서의 간호사 생활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외국인 친구들에게 간호학과라고 하면 간호사는 존경받는 직업이라며 대단하다고 해요. 근데 한국에선 그런 말 못 들어봤어요.” 그는 한국에선 간호사가 의사의 보조 역할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전문 의료인 대우를 받고 싶다고 밝혔다.

간호사 장누리 씨(28)는 지난 7월 미국 간호사 면허시험인 ‘NCLEX-RN’(이하 엔클렉스)에 합격했다. 에이전시와도 계약을 마친 상태로, 인터뷰를 통해 합격하는 병원에서 근무하게 된다며 “콜롬비아 대학병원에서 일하길 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장 씨는 간호대 졸업 후 한국 5대 병원에 들어가는 대형 병원에서 2년간 근무했다. 국내에서 복지와 처우가 가장 좋다고 알려졌지만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하루 근무가 10시간을 훌쩍 넘겼다. “초과근무 수당은 하나도 못 받는데, 병원은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 화장실에 가거나 식사할 시간도 없이 일했던 그는 “오히려 내가 환자가 돼가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결국 장 씨는 병원을 그만두고 영어공부와 엔클렉스 준비에 매진했다. 합격 후 지금은 필요 경력을 채우기 위해 다시 한국 병원에서 근무는 중이지만 여전히 ‘일할 맛 안 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엔클렉스 강의와 해외 취업을 알선하는 강동엔클렉스학원 이명자 원장은 “최근 10년 동안 학원에 등록한 간호사가 약 3만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특히 과거에 가족이민을 위해 면허를 따는 30~40대 간호사가 많았다면, 최근엔 20~30대 초반 젊은 간호사들도 많이 찾는다. 이날도 20대 간호사 두 명이 등록 상담을 위해 학원을 찾았다.

그렇다면 젊은 간호사들이 미국 취업을 결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원장은 “국내에선 나이나 학벌 차별도 심하고 근무 환경, 연봉 등 처우도 열악하기 때문에 해외 취업을 고려한다”고 밝혔다. 다른 직업에 비해 간호사는 영주권을 얻기 쉽다는 점도 한 몫 한다. 2016년 미국 노동 통계국(BLS)에 따르면 고령 인구 증가로 향후 10년 동안 15%의 간호사 수요 증가할 전망이다. 또한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 기사 <Nurses Are Again in Demand>는 텍사스 등 일부 지역은 간호사 수요가 ‘재 성수기’에 접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상황에서 간호사 이민자는 반가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국 면허와 영어실력을 갖춘 한국인 간호사는 6개월이면 영주권을 얻을 수 있다.

미국은 간호사가 ‘전문 의료인’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처우와 복지도 손꼽을 만큼 좋다. 2017 미국 뉴스&월드 리포트에서 발표한 ‘미국 최고의 직업 100선’에서 전문간호사(nurse practitioner)가 2위를 차지했다. 연봉, 업무 스트레스, 수요, 성장성, 미래 전망, 생활환경 등에 대한 노동통계국 자료를 종합한 결과다. 하지만 한국고용정보원이 실시한 2017 직업만족도 조사에서 가정전문간호사의 직업만족도 순위는 93위에 그쳤다. 매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갤럽(gallup) 설문조사에서도 ‘직업윤리, 정직성 부문’에서 간호사는 15년 연속 1위다. 유일하게 간호사가 1위를 놓친 해는 911테러가 일어난 2001년 소방관이 1위를 했을 때다.

김유진 씨(가명·28)는 5년차 미국 간호사다. 김 씨는 인식과 보수 면에서 매우 만족한다고 밝혔다. 일주일에 3일만 근무해 개인 시간도 많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휴가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문제되는 ‘태움 문화’도 없다. 태움 문화는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폭언이나 폭행을 비롯한 직장 내 괴롭힘을 말한다. 김 씨는 “여기선 신규 간호사가 30년 베테랑 간호사와 친구처럼 지낸다”고 설명했다. 한편 ‘간호사 메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생활을 담은 SNS를 운영하는 김 씨는 한국 간호사들의 상담 요청도 많이 받는다. “이민을 고민하는 간호사분들께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정책적 개선은 멀고 이민은 가깝다’라고요.”

한국 의료계는 간호사 인력난을 겪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2017년 말까지 ‘간호인력 수급 종합 대책’을 내놓을 방침이다. 최근 5년 평균 해마다 약 1만 6천명이 간호사 국가고시에 합격하지만 인력이 부족한 이유는 오래 일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간호사가 많기 때문이다. 적은 인원으로 운영하려 하는 병원도 문제다. 정 씨는 동료 간호사와 둘이서 38명의 환자까지 맡아본 경험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상적인 환자 수는 간호사 1명 당 4~5명이다. 정 씨는 “맡은 인원이 적으면 환자 상태, 투약 현황 등을 외우고 체크할 수 있는데 인원이 많으면 불가능하다”며 의료서비스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현장의 간호사와 정책 당국의 입장 차이는 근무환경 개선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정 씨는 현직 간호사들에게 ‘시간선택제 간호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육아 등으로 병원을 그만둔 간호사가 정규직이 아닌 시간선택제 간호사로서 필요시 대체근무를 하는 제도다. 따라서 경력단절을 막을 수 있고, 정규직 간호사들은 유연한 근무가 가능하다. 미국은 이 제도가 활성화돼 있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이런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에 잘 반영되지 않는 상황이다.

지난해 10월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는 1960~70년대 한국인 파독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당시 한국 사회에 대한 절망감과 해방을 위한 시도가 한국 여성들의 중요한 이주 동기였다고 한다. 한국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문 여성인력의 이민 동기가 50년 전과 다름이 없다는 점은 모순이다. 장 씨의 오랜 목표 중 하나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 간호사 처우 개선을 위해 직접 나서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 간호사들에겐 변화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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