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길’은 김성우 선생의 책, ‘신문의 길’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평생을 신문 기자로 살았던 기억을 담은 이 책을 읽으며 기자직의 의미와 저널리즘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칼럼을 통해 평생의 업으로서, 전문직으로서의 기자직과 그를 통해 실천되는 저널리즘의 가치를 조명해 보려한다. 특히 기자의 정체성과 저널리즘의 본령이 흔들리는 요즘 세태에 제대로 된 기자의 가치관은 어때야 하는 지, 좋은 기사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는 글을 써보려 한다.

첫 회에 소개하는 인물은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Murrow)다. 머로우를 처음 알게 해준 사람은 댄 래더 (Dan Rather)였다. 1996년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당시 CBS 저녁 뉴스의 앵커였던 래더의 강연이 있었다. 유엔에서 열린 텔레비전 국제포럼에 참석해 이 강연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래더는 자신이 머로우 때문에 방송기자가 됐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머로우가 하는 뉴스를 보며 꿈을 키웠고, 미국 방송기자의 대부분은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성장기를 거쳤을 것이라는 게 래더의 요지였다.

1982년부터 문화방송에서 기자 일을 시작했고, 미국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저널리즘 석사, 박사과정을 마쳤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충격이었다. 그 뒤 에드워드 머로우 관련 책과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글과 영상자료가 있었다.

데이비드 핼버스탐이 쓴 ‘The Powers That Be’에 머로우 얘기가 길게 소개돼 있었다. 핼버스탐은 이 책에서 1950년대와 60, 70년대 미국 언론계의 주요 언론사와 경영자, 에디터들의 활약상을 흥미롭게 다뤘다.

이 책에 따르면, 머로우는 1937년 CBS 방송의 유럽지사장으로 런던에 파견된다. 그 때는 마침 히틀러가 유럽전역을 점령하고,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당시는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 라디오가 뉴스를 전하던 시기였다.

머로우는 매일 저녁 독일의 런던폭격상황을 미국으로 전하는 특파원 역할을 수행했다.  동시에 유럽 각 지역에서 해당 지역의 상황을 전해줄 동료 기자를 선발해 유럽취재팀을 운영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한 복판에서 방송 국제보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업이 머로우의 임무였다.

그는 이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했다. 저녁 8시 무렵이 되면, 미국 전역의 청취자들이 머로우 리포트를 듣기 위해 라디오 앞으로 모여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개입할 의지가 적었다. 대공황을 극복하기에도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격의 한복판 현장에서 독일의 공습모습과 런던시민들의 참상을 매일 생생한 목소리로 전하는 머로우의 리포트는 미국의 여론을 서서히 바꿔가기 시작했다.

핼버스탐의 글을 보면 머로우가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영국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머로우의 영향력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들 나라의 운명은 도마 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인들은 권력이 변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머로우가 당시 영국에 와있던 어느 신문기자나 심지어 주영 미국대사보다도 훨씬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국을 도와줄 사람은 그들이 보기에 머로우 기자였다. 머로우는 영국인들이 느끼기에 자신들을 미국정부뿐 아니라 미국시민들에게 대변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외교관이었다.”

“This ...  is London”으로 시작하는 머로우의 CBS 리포트는 연극 전공자다운 뛰어난 전달력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아 방송 리포트의 전형으로 자리를 굳혔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정부는 머로우에게 BBC를 맡아서 운영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머로우는 그러한 부탁을 뒤로하고 뉴욕으로 돌아와 미국 방송뉴스의 전설로 남는 업적들을 남긴다.

오늘날까지 가장 강력하게 기억되는 프로그램은 ‘See It Now’라는 30분짜리 주례 보도 프로그램이다. 특히 1954년 머로우가 그의 프로듀서였던 프레드 프렌들리(Fred Friendly)와 함께 만든, 매카시즘을 비판하는 3부작은 당시 미국문화계를 공포에 떨게 하며, 많은 정치인과 예술가를 희생시킨 매카시즘의 광기를 단번에 잠재우는 위력을 발휘했다.

 

 

‘Good Night and Good Luck’이라는 영화는 이때의 상황을 실감 있게 극화한 작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과 중공의 등장으로 미국 사회를 휩쓸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Red Scare)’를 텔레비전 기자가 나서 제작한 시사프로그램 3편이 사라지게 했다는 사실은 TV 저널리즘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남게 됐다.

머로우는 1960년, ‘부끄러운 가을걷이(Harvest of Shame)’라는 기념비적 다큐멘터리를 방송한다. 한 시간 남짓 되는 이 프로그램은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들이 일하는 농장들과 이동경로를 따라가며 촬영해 고발하는 내용으로 역시 방송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선구자로 자리 잡았다.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며, 미국 텔레비전 산업은 상업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으로 진행한다. 고급보도물과 방송의 공익적 역할을 강조하는 머로우의 철학이 중시되기 보다는 퀴즈쇼와 드라마, I Love Lucy 류의 오락 프로그램들이 주요 시간대를 점령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견고하게 다져졌던 사주 윌리엄 페일리 (William Paley)와 머로우의 관계도 차츰 소원해지고, See It Now 프로그램의 편성은 요일과 시간대에서 주목 받기 어려운 위치로 계속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머로우는 1958년 10월 15일 전미방송보도국장 연차총회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역사에 남은 연설을 남긴다. 다음 인용문은 그 연설의 일부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아니 100년 쯤 지나, 어느 역사가가 있어 요즘 우리 3대 네트워크가 방송한 프로그램 일주일치 정도를 조사하게 된다면, 그는 생생한 영상을 통해, 우리 방송들이 얼마나 퇴폐적이고, 시민의 일상적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세상을 보여주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우리가 지금 텔레비전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고 시청자를 속이는 지, 또 오직  재미만 추구하고, 현실문제로부터 그들을 분리시키는 지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 방송언론인들과 경영자들은 너무 늦게야 우리가 세상을 크게 망가트렸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한국의 방송현실을 대입해 보아도, 여전히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진단이다. 이 연설에서 머로우는 텔레비전이 제대로 기능을 하게 되면 시민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전하고, 시민을 교육하고, 심지어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역할까지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경영자와 기자, 프로듀서 등 방송인들이 그러한 방향으로의 의지가 있어야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안타깝지만, 그러한 의지가 존재하지 않으면 텔레비전은 그저 상자 속에 들어있는 전기줄과 전구들의 집합체 (wires and lights in a box)에 지나지 않게 된다.

 

댄 래더 같은 후세 방송기자들은 머로우를 미국 방송기자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1960년대부터 CBS 저녁뉴스의 앵커로 20년간 미국 TV뉴스를 지배해온 월터 크롱카이트 (Walter Cronkite)도 머로우가 스카우트해서 키워온 머로우 아이들 (Murrow Boys) 가운데 마지막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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