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을한 선생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3대 기자로 하몽 이상협과 민세 안재홍 그리고 천리구 김동성을 꼽았다. 그가 1969년 쓴 김동성 선생의 추도사에 포함된 내용이다. 이상협과 김동성은 1920년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했던 기자들이고, 안재홍은 1924년부터 10년 쯤 조선일보의 주필과 부사장, 사장으로 일했던 언론인이다. 김을한은 1924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새로 출발하는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며, 이들로부터 저널리즘을 배운 사람이다.

▲ 김동성 선생의 사진.

조선일보는 1924년 월남 이상재 선생이 사장을 맡으며, 창간 시 유지하던 친일의 색채를 지우고, 민족지로서 다양한 보도기법 실험을 앞장서 시도하던 저널리즘 혁신의 본산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이상협과 김동성이 함께 조선일보로 옮겨와 식민시대 한국 저널리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갔었다. 김동성은 당시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으로 1920년대 경성의 저널리즘을 선도하던 기자였다.
 
최초의 저널리즘 교재, <신문학> 의 출판

김동성은 놀라운 인물이었다. 이분의 이름을 내게 알려준 이는 이화여대에서 언론학을 가르치다 은퇴하신 김동철 교수였다. 2002년 쯤 한국 언론에 역삼각형식 기사가 언제 쯤, 어떠한 경로를 통해 도입됐는지를 듣기위한 특강에 초청된 김 교수는 <신문학> 이라는 책을 건네주셨다.

1924년 조선도서주식회사(대표 송진우)에서 김동성 편저로 출판한 이 책은 당시 돈, 일원 오십 전으로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모두 253 쪽으로 미국 대학에서 사용하는 저널리즘 교재를 한국 언론현실에 맞게 그 내용을 추려 번역한 것으로 보였다. 신문사의 조직이나 제작 시스템은 한국 신문사의 사례를 그대로 설명했고, 유형별 기사의 사례들은 모두 동아, 조선 등 당시 발간되던 신문에서 뽑아서 소개했다.

▲ 김동성 선생이 만든 신문학 교재.

 
2000년대 초 만해도 역삼각형 기사가 한국에 정착한 시기는 1950년대에서 60대년 초라는 주장이 거의 정설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이 들어와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언론도 미국식 모델을 안착시키기 위해 한국기자 가운데 우수한 사람들을 시카고에 있는 노스웨스턴대학으로 보내 교육을 시키던 시기가 그 무렵이기 때문이다.
 
김동성 선생의 <신문학>은 이러한 주장을 뒤집을 매우 유력한 근거자료였다. 책을 들여다보니, 느슨하기는 해도 1920년대 이미 역삼각형식 기사쓰기에 대한 지식이 한국 신문 편집국에 도입돼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책에서 설명하는 사건기사 구조는 전형적인 역삼각형 틀을 따르는 리드와 본문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신문학> 책은 75항에서 다음과 같이 “기사의 서두”라는 요소를 설명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신문기사에 가장 적절하다. 사건의 요점을 기사의 서두에 기입해서 독자로 하여금 그 사건에 관한 인물과 시간, 장소, 원인과 결과를 자세히 알게 하느니, 이는 다시 말하면, 무엇, 누구, 언제, 어디, 어째서, 어떻게 등을 간단명료하게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설명은 오늘날 통용되는 스트레이트 기사의 리드에 대한 설명과 거의 흡사하다. 강의 다음 날 도서관에 달려갔다. <천리구 김동성> 이란 책이 있었다. 김을한 선생이 김동성 선생 사후 그를 기억하는 명사들의 추모 글과 김동성 선생의 자전 에세이 들을 모아 편집한 책이었다.

▲ 책 <천리구 김동성> 사진.

오하이오 주립대로의 유학, 1909년
 
김동성 선생은 1890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 곳에서 윤치호 선생이 설립한 한영서원이란 학교를 마치고, 중국 소주에 있는 동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열여덟 살 때였다. 1년을 중국에서 보낸 뒤, 그는 잠시 귀국했다, 이번에는 미국으로 공부 길을 나선다. 그가 선택한 여정은 상해에서 배를 타고 런던으로 간 뒤, 다시 뉴욕으로 가는 긴 항해였다.
 
김동성은 19세 나이에 아칸소 주에 있는 헨드릭스대학에서 첫 해를 보낸다. 개성에서 사귄 미국 남 감리교회 선교사의 고향이 그 곳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1909년,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Ohio State University)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거기서 저널리즘을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미주리대학이 1908년, 컬럼비아대학은 1912년 저널리즘 스쿨을 설립한 기록이 있으니, 김동성은 미국 기준으로도 저널리즘 공부에서는 선구적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0년 가까운 시간을 미국에서 보낸다. 1916년에는 신시내티에서 <미주의 인상> (Oriental Impressions in America)이라는 영어책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 대학 공부를 마칠 무렵 이미 저널리즘 글쓰기로 다져진 문재가 빛을 발한 것으로 보인다.

▲ <미주의 인상> 한국어 판.
▲ <미주의 인상> (Oriental Impressions in America) 발간 당시 표지.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 1920년

동아일보 창간은 현대 한국언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성순보와 독립신문에서 시작된 근대 한국언론사는 일제가 시작되며 암흑기를 지나다, 1920년 민간신문의 등장으로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식민지 시대에 한국인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창구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동아 창간에 참여한 기자는 20여명이었다. 김동성은 창간업무를 주도하던 이상협의 부탁으로 조사부장직을 맡는다.

당시 영어를 구사하는 기자로는 김동성이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동아일보는 그를 특파원으로 중국에 파견해 창간호를 위해 중국명사들의 축사를 얻어 오도록 했다. 김을한의 표현을 빌면, 김동성은 한국 최초의 해외 특파원이었다. 그는 북경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북경대 총장 채원배, 중국 국무총리 근운봉, 당시 필명을 날리던 양계초 등 중국인 명사들의 축하인사와 휘호를 창간호에 게재할 수 있도록 가져왔다.

만국 기자대회 한국대표

1921년 10월에는 하와이에서 2차 만국기자대회가 열렸다. 샌프란시스코 창립대회 이후 두 번째 열리는 대회였다. 동아일보에도 참석요청이 와서 김동성 선생이 한국 언론을 대표해 참석하게 된다. 일제 총독부에서 여권을 내주지 않으려 하는 바람에 어렵게 출국한 그는 10일 동안 열린 대회에 코리아로 표시된 좌석에 앉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조국을 대표하는 감동을 맞보게 된다.

200여명의 기자가 참석한 이 대회에서는 미주리대학 신문학과장이던 월터 윌리암스 교수를 회장으로 다시 선출했다. 김동성은 처음 참석한 세계기자대회에서 부회장으로 뽑혔다. 동아일보는 이 사실을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하며, 축하광고를 모집하기도 했다. 민족정신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 만국기자대회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기자대회를 마치고 김동성은 하와이에서 곧바로 워싱턴으로 이동했다. 1차 세계대전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세계군축회의가 열리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실을 동아일보에도 알리지 않고 움직였다. 일제가 허락하지 않을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워싱턴D.C에 도착해 그는 전에 사귀어 두었던 미국의원의 도움으로 50석 밖에 없는 기자석 가운데 하나를 차지 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신문들은 53명이나 되는 취재단을 파견했으나, 그들에게 배당된 자리도 하나뿐이었다는 것이 김동성의 설명이다. 만국기자대회와 워싱턴 군축회의에서의 활약은 하루아침에 김동성을 식민 조선의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조선일보에서의 저널리즘 혁신

김동성은 1924년 동아를 떠나 조선일보로 향한다. 송진우 사장과 사이가 틀어진 이 상협 편집국장이 동아를 떠나자, 김동성도 그와의 의리를 지키려 함께 움직였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상협과 김동성의 노력으로 친일파의 손을 벗어나, 민족자본의 손에 넘어온 상태였다.

편집국장에 임명된 김동성은 다양한 저널리즘 혁신 작업에 착수한다. 대표적인 시도가 만화의 연재와 부인란의 신설, 그리고 그러한 지면을 뒷받침할 여기자의 채용이다.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때부터 그림에 조예가 있었던 김동성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멍텅구리>라는 풍자만화를 지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최멍텅, 신옥매, 윤바람 등 인물이 만들어가는 풍자만화는 엄청난 독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를 선발한 것도 김동성의 안목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조셉 퓰리처가 운영하는 신문에서 넬리 블라이(Nellie Bly)라는 여기자가 다양한 특종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김동성 국장은 최은희 기자를 그러한 재목으로 키우고자 했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여기자를 걸인으로 변장시켜 시민들의 반응을 기사화하는 시도 등은, 엄혹한 식민 시대였지만 혁신 조선일보가 시도하는 새로운 기사쓰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 뉴스통신산업의 산파

김동성 선생은 해방이 되며, 미군정 당국에 의해 통신사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군정이 운영하는 통신사는 AP 등 유수의 해외 통신과 계약을 체결할 수 없는 상황이 확인되며, 한국 민간인이 출자하는 새로운 통신사의 설립이 필요해졌다. 김동성은 1945년 10월 자본이 있는 지인들을 설득해 합동통신이라는 회사를 출범시키고, 그 회사 사장으로 취임한다. 해방 후 서울에 제대로 된 통신이 처음으로 출현하게 된 배경이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에 단독 정부를 출범시키며 김동성을 초대 공보처장으로 임명했다. 그의 국제적 경험과 기자 경력, 그리고 유창한 영어 실력이 신생공화국의 대외 관계에 꼭 필요한 자산이라고 판단한 듯 보인다.

격동의 현대사를 보내며, 우리는 멀지 않은 과거인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우리 언론계에 어떠한 인물들이 있었는지를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 현장 기자들은 물론이고, 공부를 한다는 사람들도 과거에 무지하기는 마찬가지다. 한일합방 전에 미국으로 언론학을 공부하러간 선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김동성은 그렇게 10년을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 현대언론의 바탕이 되는 신문의 발전에 청춘을 바쳤고, 중년 후에는 한국 뉴스통신의 토대를 닦는 데, 진력했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오늘날 이 정도의 언론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배경에 김동성 선생 같은 분의 분투가 있었음을 기억하고자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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