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저널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 법 제정을 두고 벌어진 ‘동물국회’ 보도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몇 년 전 학술지에 발표한 ‘갈등 유발형 저널리즘’ 논문을 읽었다며 개선방안을 말해보라 했다.

매우 좋은 질문이었다. 오늘날 벌어지는 한국 언론의 보도행태 문제를 정면에서 다뤄보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반가웠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기자가 있다는 사실도 다행으로 느껴졌다.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는 정치현실의 한 가운데 뉴스가, 저널리즘의 문제가 자리한다는 문제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답을 하는 마음은 그러나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한국 언론의 처지에서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기자와 통화를 마치고 며칠 이 문제를 생각했다. 기자에게 다 얘기하지 못한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할 수 있었다.
 
‘동물국회’ 식 보도에 대한 원인은 네 가지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한국 정치보도에 고착화된 ‘he said, she said’ 보도방식의 폐해다.

이 용어는 토머스 패터슨 (Thomas Patterson)이 2013년 출판한 ‘Informing the News’라는 책에서 소개했다. 미국 매체의 1차원적 보도행태를 묘사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저널리즘에 더 잘 들어맞는다.

▲토머스 패터슨의 <Informing the News>

정치보도 뿐 아니라 한국 언론은 모든 기사를 “그는 이렇게 말했고, 다른 이는 저렇게 말했다”는 방식으로 쓴다. 지극히 표피적인 현상전달 방식이다. 기자들은 이를 객관적인 자세라고 믿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언론관을 몸으로 보여주는 현실이 기자회견장의 받아치기 풍경이다. 청와대나 국회나, 아니면 검찰청을 막론하고 한국의 현장기자는 받아치기에 몰두한다. 방송은 똑같은 논리로 싱크 따기에 매달린다.

이러한 취재체제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가장 자극적인 멘트, 가장 눈길을 끌만한 영상을 전진 배치하는 보도다. 한국당의 가장 자극적인 멘트와 민주당의 역시 공격적인 영상이 부딪치면 그를 접하는 시민은 사안의 본질은 생각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정치성향에 따라 분열되거나 정치권에 대한 혐오감을 키울 수밖에 없게 된다. 안타깝지만 우리 현장기자와 그들을 지휘하는 에디터의 수준은 이러한 보도행태에 머물러 있다.

둘째, 이러한 보도행태의 뿌리는 두 가지다. 일차적, 구조적 원인은 신문과 방송사의 영세성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과 방송사의 취재인력 규모는 너무 작다. 그러다보니 기자 개인이 처리해야하는 기사량이 지나치게 많다.

온라인 기사를 출고해야하는 부담이 더해져 혼자서 하루 열 개가 넘는 기사를 써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가 한참 됐다. 취재현장 여건이 일차원적 기사쓰기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의미다.

받아치기가 아니라 맥락을 파고들고, 추가 질문을 통해 발언자의 진의를 추궁하는 취재가 구조적으로 어려우니 보도가 계속 취재원의 말에만 의지해 자극적 성향을 유지하게 된다.

취재구조의 영세성과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정치인과 기자의 상호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의 문제도 보도가 사회갈등 구조를 부추기는 주요 원인이다.

한국 정치인은 기자를 기본적으로 홍보요원 정도로 생각한다. 대통령부터 장관,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등 힘 있는 정치지도자 일수록 이러한 생각을 공유한다. 왕조시대의 유물이자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적 지도자들이 의도적으로 강화한 관행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 틀이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적 지도자를 자임하는 정치인에 의해서도 계속 되풀이 된다는 현실이다. 특히 대통령과 그 주변인은 정당에 관계없이 이러한 인식에 집착하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더 안타까운 현실은 기자 대다수도 이러한 인식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기자회견에서 질문하지 않는 습관의 형성은 이러한 집단인식의 표상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근본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러한 취재문화이다.

여기에 민주화 이후 고착화된 정파적 언론제도가 갈등구조를 완성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보수와 진보는 이제 모든 국민이 인식하는 신문과 방송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진보매체는 오로지 공격과 비판으로 일관한다. 그러다 진보세력이 권력을 잡으면 순식간에 정권의 응원단, 경호세력으로 돌변한다. 보수매체도 마찬가지다. 권력과의 유착과 이해관계의 공유가 언론운영의 기본지침으로 작동한다.
  
정파적 저널리즘의 더 큰 문제는 비판이나 공격의 대상이 국민이 낸 세금을 사용하는 청와대나 장관, 공직자, 정당이 아니고 반대의견을 표현하는 신문과 방송사라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신문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정치행위를 하는 주체로 변신하게 된다. 방송 또한 공영이나 종편을 가릴 것 없이 정파적 세계관과 이해관계로 무장한 선전도구가 될 뿐이다.

요즘 우리가 접하는 한국의 진보나 보수매체는 어느 쪽에도 진실에 대한 열정이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정파에 관심 없는 일반시민에 대한 배려도 들어설 공간이 없다.  사회가 갈라서고 정쟁이 심화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시민이다.

▲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의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저널리즘은 시민이 자유로울 수 있고,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진실을 전하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쓴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에서 밝히는 첫 번째 원칙이다. 요즘 마주하는 한국의 정치보도에서는 안타깝지만 이러한 노력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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