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 23년 6개월을 지냈다. 현장에서 취재하며 기사를 썼던 기간은 10년이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데스크로서 후배와 외부 전문가의 글을 고치는 기간이었다. 인력개발팀장 근무를 계기로 2004년부터는 기자 지망생과 대학생의 글을 읽었다.

강의를 많이 하고, 글을 많이 읽고 쓰고 고치지만 말하기와 글쓰기를 쉽게 생각한 적이 없다. 아니 갈수록 힘들다. 내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가. 내 생각을 말과 글에 정확하게 담아서 전하는가.

두 가지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나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문제이다. 둘은 밀접하게 연관된다.

나의 문제는 능력 및 경험을 말한다. 남의 말, 그리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확하게 보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면에서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

김훈의 소설과 산문을 읽으면 내 글에 내면의 단단함이 없음을, 유홍준의 답사기와 유종호의 평론을 읽으면 내 글에 문사철(文史哲)의 향기가 없음을, 토머스 프렌치(Thomas French)와 진 웨인가튼(Gene Weingarten)의 기사를 읽으면 사실의 아름다움이 없음을 절감한다.

남의 문제는 나의 언어가 남의 언어와 같지 않아서 생긴다. 첫째, 내가 사용하는 단어와 남이 사용하는 단어가 외형적으로는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달라서 곤혹스럽다.

수업시간에 누군가를 지목하면 학생들은 ‘저격’이라고 한다. 작성자를 밝히고 글에 대해 평가하면 학생들은 ‘공개처형’이라고 한다. 조언과 충고가 길어지면 학생들은 ‘암에 걸릴 것 같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저격당하고, 공개 처형되고, 암에 걸린 느낌이 든다.
둘째, 나의 생각과 표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힘들 때가 있다. 나는 이런 취지로 말했는데 상대방은 정반대로 해석하면 당황스럽다.

미국의 어느 저널리즘스쿨에서 ‘타자 보도하기(Reporting the other)’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여기서 타자(the other)는 잘 알지 못하거나, 만난 적이 없거나, 싫어하는 유형을 말한다. 교수는 학생이 타자를 만남으로써 경험과 사고의 폭이 넓어지기를 원했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내 수업에서 시도했지만 결과는 별로였다. 대부분의 학생은 누군가를 타자로 규정하면 자신의 성향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보수주의자를 취재함으로써 자신이 진보주의자로 비춰지기를 싫어했다.

나는 학생이 캠퍼스를 벗어나 다양한 사람과 대화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학생은 자기성향이 드러나고, 이런 성향이 교수와 다르면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언어가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그런데, 우리가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고 말을 해버리면, 이런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심화시킵니다……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언어적 비극은 듣기(hearing)가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채팅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바다의 기별, 148쪽)

서로를 이해하는 일은 말과 글의 정확성을 전제로 한다. 말과 글이 정확하지 않으면 내가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은 나와 학생의 상호이해를 위해 시작했다. 말하기와 글쓰기가 여전히 힘들지만 후속 코너에서 계속 하기로 했다. 잘해서가 아니라 잘하고 싶어서다. 학생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잘 알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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