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심재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의 로마 관광여행 칼럼을 싣는다. 제 1편은 로마 여행의 의미와 느낌을 서술했다. 제 2편은 콜로세움과 교황청 이야기, 제 3편은 로마에서 기차로 두 시간 남짓 떨어진 르네상스의 발원지 피렌체에 대한 여행기를 다룬다.

로마에서 하루라도 머물 수 있다면 꼭 가봐야 할 장소가 콜로세움과 바티칸 교황청이다. 콜로세움에서는 목숨을 건 결투에서 승자만이 살아남는 야만적 민주주의가 꽃 피웠다. 대조적으로 교황청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신성과 만난다.

콜로세움은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면 다다른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10분 이내 거리다. 콜로세움에서 로마 제국 대로(Via dei Fori Imperiali)를 따라 베네치아 광장까지 걸어가기만 해도 로마 관광의 절반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려운 로마 건축물로 둘러싸인 대로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늘 사람이 북적이는데, 바이올린과 하프 그리고 트럼펫 선율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진다. 운이 좋다면 길거리에서 군악대 연주까지 덤으로 들을 수 있다.

지중해 최상의 자유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도시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듯이, 로마에선 이 산책로를 반드시 걸어봐야 한다. 콜로세움부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비너스와 로마 신전, 티투스 개선문,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모아둔 베스파 박물관이 열병식을 치르듯 좌우로 늘어섰다.

타임머신을 타고 로마 시대로 돌아간 감흥에 젖어 걷다 보면 어느새 캄피돌리오 언덕과 조국의 제단에 이른다. 통일된 조국을 이룬 이탈리아 국민의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조국의 제단 앞이 바로 베네치아 광장이다.

로마의 대다수 건물은 500년 이상 된 중세 고딕이나 근세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다. 웅장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빛바랜 풍모가 고색창연하다. 그런데 조국의 제단은 주변의 고풍스런 건물 사이에서 산뜻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눈에 확 뜨인다. 반도 통일의 어려움을 겪어서인지, 이탈리아의 국경일과 정부의 기념식을 이곳 앞에서 치른다.

로마에 도착한 첫날 오후부터 저녁 늦게까지 콜로세움에서 시간을 보냈다. 살육의 대행진이 펼쳐졌던 야만의 현장이었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원조 콜로세움을 모방한 다양한 스타디움이 세워져 스포츠 경기가 펼쳐진다.

▲ 콜로세움

미국 로스엔젤래스 다운타운에 가면 남가주대학의 미식 축구장으로 사용되는 경기장이 콜로세움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경기의 규칙에 따라 강자가 승리하면 약자도 억울할 것이 없다는 자본주의식 정글의 법칙이 이곳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개발됐다.

그래서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코모두스 황제까지 결국은 러셀 크로우가 열연한 막시무스에게 져서 황천길로 갔다. 강자도 영원한 강자로 남을 수 없음을 로마사는 보여준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로마의 전성기였던 다섯 황제 시대의 막바지를 배경으로 삼는다. 검투사의 목숨을 건 싸움이야말로 수만 명의 로마 시민을 콜로세움에 모으려는 초기 광고홍보 역사의 시작이다. 이때가 바로 팍스 로마나로 구별되는 시기였다 (김경현, 콘스탄스누스 황제와 기독교, 25쪽, 서울: 세창, 2017).

콜로세움 위로 떠오른 달은 29년 전 런던에서 더블린으로 가는 길에 세인트 조지 해협을 건너면서 봤던 달이나 최근 서울의 이태원 집 옥상에서 보던 달이다. 초승달을 보고 서울을 떠났는데 콜로세움 위의 달은 이미 보름달에 가까웠다. 아일랜드 바다나 이태원 옥상이나 콜로세움 위의 달빛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눈길처럼 자애롭고 은은하다.

둘째 날 호텔에서 아침을 서둘러 먹고는 테르미니로 가서 노선도에 붉은색으로 칠해진 라인 A 전철을 탔다. 여섯 번째 정거장인 옥타비아노-산 피에트로 역에서 내려서 세 블록 걸었다. 회색으로 바래진 바티칸 교황청의 담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티칸 관람은 보통 박물관으로부터 시작한다. 불현 듯 박물관에서 한나절을 보내도 다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티칸 박물관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성 베드로 광장으로 갔다. 마드리드 학회에 만났던 김광미 타우슨대 교수가 로마를 간다면 꼭 베드로 성당의 돔에 올라가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앞선 여행자가 현명한데 그의 추천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성 베드로 광장은 영어로는 St. Peter’s Square이다. 이탈리아어로는 Piazza San Pietro로 불린다. Piazza가 광장이며 San은 성인을 뜻한다. Pietro가 영어로는 Peter, 우리말로 베드로이다.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거장인 베르니니가 1656년에 설계해 12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668년에 완공했다.

데칼코마니 작품을 보는 듯한 정교한 좌우 대칭 배치가 각각 240m나  펼쳐진다. 테라스 위로는 대리석으로 빚은 140명의 성인이 조각됐다는데 일반인의 눈으로는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베드로 광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향해 팔을 벌린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처음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친지에게 당시의 감격을 전달하기 위해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댔고, 비디오 녹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부터 봐야할지 눈길이 분주했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25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눈에 들어온다. 김문환 세명대 교수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신과 동격이다. 태양신 문장이 있는 오벨리스크도 베드로 광장에서는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의 건축물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피에트로 광장의 건축가 베르니니의 천재성이랄까. 베드로 광장의 전면에는 성 베드로 성당이 자태를 드러낸다. 성당의 제단 밑이 바로 첫 번째 교황으로 여겨지는 베드로가 묻혀있던 곳이라 한다.

로마 교황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바티칸 용어부터 구별해야 한다. 바티칸시국은 가톨릭 교황이 있는 바티칸시로 이뤄진 국가이다. 테베레 강 서북부의 바티칸 언덕 아래 있는 도시국가여서 시국이라 부른다. 성 베드로 성당, 광장, 박물관 그리고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구성된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로, 교황의 근무처는 성 베드로 성당 옆에 따로 자리한다.

고교 선배인 이진규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6년 동안 매년 여름 교황을 알현했다고 한다. 교황청이 직접 운영하는 베들레헴 대학의 상임이사이기 때문이다. 스위스 출신 근위병, 빨강과 노랑과 보라의 얼룩덜룩한 제복의 보초병을 통과해 직접 교황을 만나보는 기분은 어떨까.

긴 줄을 서서 광장의 이곳저곳을 살펴는 동안 차례가 왔다. 입장료를 내고 성당 꼭대기로 올라갔다. 돔은 이탈리아어로 쿠폴라(Cupola)이다. 쿠폴라 산 피에트로(베드로 성당 돔)의 입장료는 걸어서 올라가면 8유로, 엘리베이터를 타면 10유로이다. 승강기 앞에 관광객이 장사진을 쳐서, 10유로 입장료를 냈으면서도 걸어서 올라갔다.

타원형 계단을 돌고 돌다 보니 한 명 정도가 지날 수 있는 좁은 계단이 나타났다. 이 좁은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니 열쇠 모양의 대성당 내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쿠폴라의 천장 바로 밑, 둥글게 둘러진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바라보다 대성당의 루프탑으로 나왔다.

▲ 성베드로 성당의 옥상에서 로마시를 바라보면 베드로 광장이 둥근 열쇠 모습으로 나타난다.

기념품 매장에 들어서니 뜻밖에 한국인 모습의 수녀가 맞아주신다. 이곳에 온지 9년이 넘었다는 서마리아 릴리아나 수녀다.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회 소속이다. 인자하고 소박하며, 이곳을 들린 관광객에게는 꽤나 알려져 있다.

지인이자 한국일보 경제부장 출신의 이백만 교황청 대사에 따르면, 바티칸 소속 신부를 포함해 4명의 한국 사제가 교황청 정규직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이외에도 서로 다른 수녀회 소속의 한국인 수녀 6명이 교황청에서 봉사한다.

이백만 대사는 “바티칸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지만 교황청은 종교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말한다. 현재 교황청 수교국은 180여 개국으로 한국처럼 상주 대사를 둔 나라는 85개국이다. 교황청 프로토콜에 따르면 이탈리아 대사는 바티칸시국 대사를 겸임할 수 없다.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이 교황청을 방문했다. 이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북한에서 공식 초청장을 보내준다면 방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같이 교황청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교황청 2인자인 파로린 국무원장 추기경에 의해서도 확인됐다. 국무총리격의 파로린 추기경이 지난해 10월 17일 한국 대사관저를 방문해 대한민국과 교황청 간 정상 만찬이 있었다, 바티칸시국의 희망대로 교황의 북한 방문이 실현돼 한반도 평화가 진전되면 좋겠다.

대성당에서 오후 3시 경 빠져나와서 교황청 담 벽을 돌아서 바티칸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그리스 로마시대 빼어난 조각을 둘러보다가 문 닫을 시간이 돼서야 겨우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섰다. 수많은 탐방객의 찬사를 받아온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장조>와 <노아의 홍수> 그리고 뒤쪽 벽면 <최후의 심판>을 보았다.

▲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여기서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하나인 ‘노력 정당화(efforts justification)’ 가설이 생각났다. 여행에서도 사전준비를 하면 할수록 기쁨과 깨달음이 커진다는 사실이다. 제 1편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베니, 비디, 비치를 외쳤듯이, 여행에서 제대로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전노력이 필요하다.

마드리드 학회 중 세고비야를 함께 들렀던 김문환, 김광미, 이혜련 교수는 학회가 끝나고 각자 다른 여행지로 향했다. 우리는 카카오톡을 열어놓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여행의 깨달음을 공유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대 그리스로마를 깊이 연구했던 미켈란젤로는 작품을 그리는 동안 교황청의 중세적 가치관과 끝없이 갈등하면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세계를 구현해낸 진정한 장인”이라고 평가한다.

김광미 교수는 “미켈란젤로가 천장에 붙다시피 작업을 해 허리가 엄청 굳어지고, 발이 작업할 때 신던 장화에 굳어버려 곤혹을 치렀으며, 물감이 줄줄 떨어지는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천장화를 그린 작업과정 자체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여행 후발자인 필자는 같은 천장화를 봤으면서도 그 정도의 감동과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는 여유를 갖고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

화가가 그릴 천장화 작업을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상반된 설명이 있다. 첫째는 “상갈로를 제치고 베드로 성당의 신축을 수주했던 브라만테가 자신의 예술적 경쟁자였던 미켈란젤로에게 불가능한 작품을 맡겨서 실패하도록 만들기 위한 의도적 음모”라는 가설이다 (최선미·김상근, 르네상스 창조경영, 195쪽, 파주: 21세기 북스, 2008). 이러한 음모설은 미켈란젤로 자신이 제기했다.

둘째는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가 경쟁자였지만 이러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예술가라고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 맡기를 처음에 고사했다. 오히려 젊은 라파엘로가 적임자라고 그를 강력히 추천했었다. 하지만, 예술적 안목이 높고 황소고집이었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작업을 맡겼다.

결국, 미켈란젤로가 첫해를 허송세월하다가 4년 만에 성공했으니 후자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불후의 명작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여러 변인이 회귀방정식에 제대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신의 섭리인 모양이다.

천재 만능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1475년 이탈리아 카센티노 지역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13살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가 돼 미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환갑이던 1534년 도망치듯이 로마로 거주지를 옮겨 로마에서 생을 마친다.

죽는 순간에도 피렌체를 그리워했다는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그리운 피렌체에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원재훈, 이탈리아의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네이버 지식백과).

천재 예술가가 죽어서라도 묻히고 싶었던 피렌체는 어떤 곳인가. 피렌체는 <모나리자>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신곡>의 단테, <군주론>의 마키아벨리, 베드로가 안수하는 <세례>라는 그림으로 중세 천년의 암흑시대와 작별을 고하게 만든 마사초,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보티첼리의 활동 무대였다.

단테가 첫사랑 베아트리체를 다시 만났던 다리인 폰테 트리니티가 있으며,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소장된 우피치 박물관이 기다린다. 해가 뜨면 피렌체로 간다. 고려대 미디어관의 시네마 트랩에서 김상근 연세대 신학과 교수의 <르네상스 창조경영> 강연을 들으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피렌체를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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