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는 유라시아 코카서스 산맥에 있다. ‘조지아 커피’ 때문인지 커피가 먼저 생각나게 한다. 한국과 수교한 지 올해로 27주년.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다.

조지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코카서스 역사의 대가 키릴 토마노프 (Cyril Toumanoff)는 조지아를 ‘역사학의 전쟁터’라고 표현했다. 지리적 특성 때문에 주변국은 끊임없이 조지아를 침략했다. (허승철, 조지아의 역사)

한국인에게는 조지아보다 그루지야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구 소련 시절에는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러시아 표기인 그루지야로 불렸지만 2008년 러시아와 외교를 단절한 뒤에는 조지아공화국이 됐다.

조지아는 1992년부터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주 아제르바이잔 한국대사관이 조지아 업무를 겸하다가 4년 전, 조지아 트빌리시에 한국대사관이 생겼다. 이후 두 나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한국수자원공사(K-water)는 지난해 8월 메스티아(Mestia) 지방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올해 1월에는 수력발전소 사업을 조지아에서 추진하기로 했다. 양국은 3월에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다.

조지아에서는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중이다. 트빌리시 자유대(Free University of Tbilisi)가 조지아 최초로 국제관계학부에 한국어 과목을 개설해 60여 명이 배운다.

이에 앞서 2016년 10월에는 전북대와 협력해 ‘제1회 코카서스 대학생 한국어 말하기 대회’라는 학생교류프로그램을 개최했다. 대회 우승자인 소피아(25)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보고 한국어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지금은 전북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는 중이다.

조지아관광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조지아 방문객이 2017년 7200여 명에서 2018년 1만 3000여 명으로 늘었다. 국내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숨은 여행지’로 소문이 나면서 마니아가 생기는 중이다.

▲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조지아대사관

조지아대사관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골목에 있다. 기자는 그반차 바르카이아 참사관을 만났다. 그는 한국과 조지아의 직항노선을 언급하면서 “지금은 여름에만 운행하지만 눈이 쌓이면 조지아 풍경이 너무 아름답고 스키 타기 좋으므로 겨울에도 열리길 바란다”며 웃었다.

한국인은 360일 무비자로 조지아 체류가 가능하다. 정기 직항편이 생기면 한국인 방문객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바르카이아 참사관은 “70년 동안 구 소련의 지배를 받았지만 다른 국가와 달리 조지아 언어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들만의 문화와 언어를 굳건히 지켰다는 뜻이다.

그는 조지아와 한국이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매우 닮았다고 강조했다. 대사관 직원은 “영화 말모이를 보고 한국도 조지아와 똑같은 아픔을 갖고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에 조지아 알파벳으로 책을 만든 학자들을 러시아군이 죽였다고 한다.

조지아는 2008년 8월 러시아와의 ‘5일 전쟁’으로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뺐겼다. 조지아에 5년 정도 살았던 정미혜 씨(24)는 “조지아인이 이곳에 가는 게 금지됐다. 러시아가 강압적으로 이 지역을 뺏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아직도 조지아를 그루지야라고 부른다. 조지아 외무부 인턴이었던 마리아미(23)는 “조지아와 러시아 관계는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랑 비슷하다. 그루지야는 러시아어에서 온 단어인 만큼 우리에게 좀 나쁜 의미가 있고 예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양국 간 경제교류와 인적교류가 늘어나는 중이지만 대한민국 국가통계포털(KOSIS)은 조지아를 아시아 국가로 분류한다. 바르카이아 참사관은 조지아를 유럽국가로 인정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조지아대사관은 역사 강연, 와인 시음회, 코카서스 문화 알리기 같은 행사를 열면서 자국을 알리려 한다.

조지아 현지에서 활동하는 여행사 ‘인포 조지아’의 박철호 대표(55세)는 “한국처럼 많은 침략을 받으면서도 고유의 언어를 갖고 문화와 전통을 잘 지켰다. 조지아인은 어릴 때부터 전통춤과 악기를 배우며 즐긴다”고 했다.

조지아에서 1년간 해외인턴으로 근무한 이송현 씨는 친구의 고향 집에 놀러 간 추억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빠스카(Paska)라는 빵을 만들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웃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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