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오브서울 특별취재팀이 뉴스통신진흥회의 제1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사업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취재팀이 출품한 <부마, 세대를 잇다> 5부작은 “부마항쟁 40주년을 맞아 부마항쟁의 현대적 의미와 세대적 공감대 형성의 문제를 심층성 있는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취재팀에는 프런티어저널리즘스쿨의 13기 3명(강수련 조윤하 최다은)과 주니어반 4명(남동연 소설희 오수민 이주미)이 참여했다. 시상식은 9월 9일 낮 12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1층의 뉴스통신진흥회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뉴스통신진흥회의 동의를 받아 수상작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 특별취재팀의 수상장면. 왼쪽부터 강수련 이주미 소설희 최다은 조윤하 남동연. 가운데는 김동규 뉴스통신진흥회 이사‧건국대 교수 (사진=뉴스통신진흥회 제공)

1부. 함께 정문을 나서다

최갑순 씨(64)는 경남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보내지 않던 시대였지만 부모는 그를 특별하게 키웠다. 공부에 욕심이 있어서 대학에 갔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담배를 물고 길거리로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담배를 피웠다. 아버지에게 들켰지만 떳떳했다. 오빠들이 다 피는데 자신이라고 안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경남대 3학년 때, 정부에 대한 불만이 대학생 사이에 널리 퍼졌다. 사복경찰이 학교 곳곳을 감시하던 상황이라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최 씨는 ‘유신 철폐! 독재 타도!’ 구호를 외치며 정문으로 향했다. 대열이 늘었다.

전면에 나섰다가 최 씨는 경찰의 표적이 됐다. 머리채를 잡혀 시멘트 바닥을 100m 넘게 끌려갔다. 다리에 피가 철철 흘렀다. 유치장에 끌려가서는 온갖 모욕을 당했다. 배후세력을 말하면 풀어주겠다는 유혹을 받고는 그럴 바에야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수사에 협조하지 않아 몇 달이 지나서야 교도소에서 나왔다.

시위를 계획했던 옥정애, 정성기 씨 등 학우와 계속 연락했다. 각자 후유증을 앓으면서도 그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시민의 피땀으로 이룬 자유와 항쟁의 역사가 잊혀선 안 된다고. 그들은 다시 힘을 모아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생생한 증언과 현장 사진을 모아 증언집을 출판하고 국가기념일 지정에 힘썼다.

이주홍 씨(61)는 부산대 시위를 주도했다. 경찰이 교문을 넘어서 최루탄을 쏘자 긴소매 재킷 사이로 독한 가루가 스며들었다. 씻어낼 틈 없이 시내로 이동하면서 몇 시간 동안 방치했다. 구치소로 끌려간 뒤에야 상처 부위에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물로 씻어냈지만 피부에 염증이 생겼다. 자국이 지금까지 남았다.

군 감옥으로 이감된 뒤에는 밥과 깍두기, 소금물만 먹으며 버텼다. 거짓 증언을 하라는 압박과 구타가 계속됐다. 한 달 정도 지나서 석방됐다. 구속기록이 남아서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다.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취직했지만 간첩이란 소문이 퍼져 은근한 따돌림에 시달렸다. 원하는 부서로 갈 수도 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고 인도와 중국에서 사업을 하며 지냈다.

어느 날, 정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39년 전의 피해를 신고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를 되새기는 일은 고역이었다. 어렵게 얻은 일상이 소중했기에 거절하며 전화를 끊었다. 지금도 경찰복 입은 사람을 보면 놀란다. 심리치료를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정도다.

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통화내용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컴퓨터를 켜고 검색하니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대 시위에 함께 앞장섰던 정광민 씨(62). 그는 연구소를 만들어 당시 상황을 조사하고 진상을 규명하는 중이었다. 고생하는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씨는 그날의 의미를 알리는 일을 하기로 했다.

정광민 씨는 1979년 10월 16일 오전 10시, 상경대학 302호에 들어가 소리쳤다. “나가자!” 중앙도서관에 도착하니 150여 명이 모였다. 정 씨는 선언문을 낭독하며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쳤다. 사복경찰이 달려왔지만 학생들이 막아서 몸을 피했다.

운동장에 가니 시위대는 3000여 명으로 늘었고 이주홍, 고호석 씨 등에 의해 부산시내로 퍼져나갔다. 시민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물과 빵을 주며 응원했다. 이틀 뒤에는 마산에서 최갑순 씨 주도로 경남대생 1000여 명이 투쟁에 나섰다. 정부는 10월 20일, 위수령을 발동했다.

▲ 부마항쟁 40주년을 맞아 기념전시회 개막식이 7월 4일 열렸다.

그날을 기억하기 위한 전시회가 40년 지나 서울에서 열렸다. 모래밭 위에 천막 2개가 보였고, 의자 50여 개가 놓였다. 참석자는 대부분 50~60대였다. 청년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땡볕 아래서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김영철 씨(23). 인제대 역사고고학과에 학생이다. 전시회를 보려고 부산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평소 역사, 특히 현대사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부마항쟁은 낯설었다.

2부. 가족이 광장에 가다

그는 대학 등록금을 벌려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갔다. 1979년이었다. 막노동을 하다가 친구를 만났다. 남동생과 이름이 같았다. 둘은 금세 친해져 한집에서 살았다. 친구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장기집권이 계속되고 서민의 삶이 궁핍한 시대. 어느 날, 분노가 터졌다. 결국 친구의 손에 이끌려 거리로 나갔다. 많은 시민이 함성을 질렀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친구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도망쳤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화목한 가정을 이뤘다. 2017년, 부산 서면역에서 촛불집회가 열렸다. 가족이 전부 갔다. 아내는 평소 손잡는 걸 싫어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손을 잡고 나섰다. 아들이 손을 놓자고 했지만 그는 그대로 잡고 있자고 말했다. 딸 이소희 씨(21)는 그런 아버지 모습이 어색했다.

소희 씨는 촛불집회 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뉴스에 탄핵 얘기가 매일 쏟아지자 정치에 관심을 두게 됐다. 대학에 가면서 정치외교학과를 택한 이유다. 수업을 들으며 역사에 흥미를 느꼈다. 특히 민주화운동에 눈길이 갔다.

그는 부마민주항쟁을 알리고 싶어 올해 서포터즈에 지원했다. 참여자를 인터뷰하고 SNS에 올리는 일이다. 6월에는 우무석 시인을 만났다. 부마항쟁을 다룬 시집 <10월의 구름들> 저자. 이 씨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인터뷰하며 느낀 감정을 말했다. 아버지는 잠자코 듣다가 딸에게 물었다. “술 한잔할래?”

아버지는 40년 전의 일을 꺼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현 창원)의 시민들은 유신체제에 저항했다. 시위는 부산대에서 시작해 24.5km 떨어진 시내 중심지까지 이어질 정도로 격렬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다수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일을 40년 지나 딸이 세상에 알리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했다. 부녀의 술자리는 눈물로 가득 찼다. 친구의 손을 뿌리친 일을 후회하느냐고 딸이 물었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도망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 때는 후회한다고 했다.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는 친구 손을 놓은 일이 상처로 남았다고 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잘하셨어요.”

취재팀은 소희 씨에게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2017년 촛불시위의 차이를 물었다. “아버지가 친구 손은 놓쳤지만 가족의 손은 잡았어요.” 어머니가 군말 없이 아버지 손을 꼭 잡은 이유를 이해했다. 아버지는 출장 중이라 함께 하지 못했지만, 소희 씨는 부마항쟁의 국가기념일 지정을 촉구하는 백만인 서명에 참여했다.

김지수 씨(21)는 2018년 10월 12일, 부산대 인덕관에서 열린 ‘부산대학교 철학과 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나갔다. 김 씨를 포함한 4명이 발표를 했다. 제목은 ‘1970년대 반유신 학생운동과 10.16 분석: 마르크스와 아렌트의 소외론을 중심으로’였다. 소희 씨처럼 김 씨 역시 고등학생 때, 촛불집회가 열렸다. 그는 소극적이었다. 친구 대부분이 참여했지만 따라가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했는데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가칭‘한국대’) 도입에 반대하는 학생총회가 열렸다. 김 씨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다음 주 강의에서 교수가 물었다. “지수 학생, 저번에 총회 갔어?” 거짓말을 했다. “네. 갔어요.” 창피함이 몰려왔다. 그래서 다짐했다. 앞으로는 스스로 떳떳해지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속 일말의 죄책감이 학술대회 발표로 이어졌고, 여기서 생긴 관심이 부마민주항쟁 서포터즈 지원의 계기가 됐다.

김 씨는 정광민 씨를 만나러 10‧16 부마항쟁연구소로 찾아갔다. 지하철 부산대역에서 2분 거리였다. 항쟁이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바로 앞에 있었다. 생각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학술발표에서 다룬 마르크스와 소득 불평등에 대해 묻자 정 씨는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했다. 항쟁 얘기를 들으며 대단하다고 느꼈다. “당시 부산대생이면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해서 잘 살 수 있을 텐데,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빨간 줄을 긋는 위험을 감수했구나.”

서포터즈는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의 고호석 상임이사(64)가 담당한다. 그는 다음세대에 부마항쟁을 알리기 위해 서포터즈 30명을 선발했다. 1979년에 항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현재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거에 지나간 죽은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로 젊은이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했다. 항쟁의 참여자와 서포터즈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셈이다.

당시로 돌아간다면 시위에 다시 참여할지를 물었다. 경남대 학생이던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홍보팀 박봉환 씨(60)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연히 참여하겠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더 바란다.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건 사실이지만 세상의 변화가 누군가의 죽음으로써 이뤄지는 방식은 바라지 않는다. 정치 자체가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보다 성숙한 정치 지형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서포터즈는 어떨까. 김주안 씨(20)는 “부마항쟁을 이끄는 사람은 되지 못할 것 같다. 경찰과 군인이 교내에 있는 상황 속에서 이상실현을 위해 행동으로 옮기기는 힘들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김영철 씨도 비슷했다. “대학생이었다면 제적을 당하고 가족들에게도 피해가 갔을 것이다. 용기를 내는 게 어렵지 않았을까.”

이소희 씨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항쟁 참여자에게 동일한 질문을 했을 때 “우리도 20대 청춘이었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이 본인과 같은 학생이었을 뿐, 영웅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 부마 민주항쟁의 역사와 정신을 조명·계승하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왼쪽). 계단에 선언문과 사진을 게시했다.

취재팀은 부마항쟁의 발원지인 부산대를 찾았다. 처음 눈에 띈 건물은 3층짜리 10.16기념관이었다. 건물 이름에서 풍기는 역사의 향기에 기대감이 컸지만 막상 들어서자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사진 9장과 선언문 4장만이 실린 게시판 2개가 전부였다. 김지수 서포터즈는 부산대 학생이지만 이곳에 들른 적이 없다고 했다. 매일 가는 학교임에도 기념관은 낯선 공간이었다.

항쟁의 흔적을 찾기 위해 캠퍼스를 돌았다. 학생과 관계자에게 ‘부마민주항쟁 조형물’의 위치를 물었다. 물어물어 찾은 건설관 앞의 비석, 새벽벌도서관 옆의 10‧16 부마민중항쟁탑과 그 근처의 몇 가지 조형물을 제외하면 당시의 역사가 보이지 않았다. 기록관도 방문했다. 취재팀이 들어서자 그제야 직원이 불을 켜줬다. 학생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부산대생들조차 부마항쟁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른 지역의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1~2년 전에는 고등학생이었던 서포터즈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교과서에 한두 줄 정도 나온 것 같아요.”

4·19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10 민주항쟁과 달리 10월 16일을 말했을 때 부마민주항쟁을 떠올리는 청년은 많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거나 수업 시간에 잠깐 스쳐 지나간 기억이 전부였다.

하지만 의미 있는 노력도 많다. 이전 세대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심을 담아 학생 서포터즈는 항쟁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낸다. 부산과 마산의 현장에서 시위를 재연하기, 대학생과 당사자가 마주 앉는 자리 만들기, 모금행사를 통해 부마 역사기념관 설립하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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