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오브서울 특별취재팀이 뉴스통신진흥회의 제1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사업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취재팀이 출품한 <부마, 세대를 잇다> 5부작은 “부마항쟁 40주년을 맞아 부마항쟁의 현대적 의미와 세대적 공감대 형성의 문제를 심층성 있는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취재팀에는 프런티어저널리즘스쿨의 13기 3명(강수련 조윤하 최다은)과 주니어반 4명(남동연 소설희 오수민 이주미)이 참여했다. 시상식은 9월 9일 낮 12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1층의 뉴스통신진흥회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뉴스통신진흥회의 동의를 받아 수상작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 특별취재팀의 수상장면. 왼쪽부터 강수련 이주미 소설희 최다은 조윤하 남동연. 가운데는 김동규 뉴스통신진흥회 이사‧건국대 교수 (사진=뉴스통신진흥회 제공)

5부. 기억에 빛을 밝히다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2013년 관련 법률이 제정되면서 출범했다. 피해를 접수하고 보상여부를 결정한다. 또 자료집을 발간하고 기념행사를 주관한다. 진상규명, 관련자와 유족의 명예회복, 실질적인 보상이 궁극적인 목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은 난항을 겪는 중이다. 위원회의 차성환 상임위원(66)은 관련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정부나 검찰, 경찰, 군 등 국가기관이 만든 자료는 여전히 제한적으로 공개된다. 2006년부터 부마항쟁 참여자와 목격자의 경험을 구술 받는 이유다. “자료는 부족한 데다 모으기 쉽지 않지만, 다행히 사람들은 살아 있잖아요.”

구술채록이 쉬운 일은 아니다. 수만, 수십만 명이 참여했지만 누가 현장에 있었는지 추적하기 힘들다. 검찰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1563명이 연행됐는데 피해보상 신청자는 300명이 안 된다. 기존 기록은 학생과 지식인 중심이므로 수많은 시민의 목소리가 여전히 묻혀있는 셈이다.

언론이 당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점도 진상규명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항쟁 당시 국제신문 기자였던 임수생 씨의 시(우리들의 역사)에는 현장과 괴리된 괴로운 심정이 드러난다.

“1979년 10월 16일 오전 19시경 국제신문사 3층 편집국…이 때 신문사 편집국 안에 문제가 생겼다. 일부 취재 기자들과 내근 기자들이 현장으로 내다를 태세를 취하고 있을 때 신문사의 고위층으로부터 금족령이 내렸다. 취재봉쇄령이었다. 이와 동시에 출입구가 모두 잠겨버렸다. 편집국 기자들은 독안에 든 쥐 꼴이 되어 버렸다. 역사적 순간을, 바로 신문사 근처에서 전개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자들은 갇힌 편집국 안에서 대형 유리창을 통하여 취재를 해야만 하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당시 부산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했던 박문두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70)은 시위 초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보도통제와 검열이 아주 심했기 때문이다. “저는 시위에 관심이 있어서 현장에 가보고 했지만 아예 보도가 안 되니까 다들 무관심했죠.”

시민의 반감도 취재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였다. 시위 중에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면 시위대가 달려가서 카메라나 필름을 빼앗았다. 사진이나 신상정보가 혹시라도 경찰에 넘어가면 바로 색출 당할지 몰라서 기자를 반길 리가 없었다. 언론인 조갑제 씨는 부마항쟁의 모든 과정을 유일하게 기록했다. 그는 당시 국제신문 기자였다. 부산대와 동아대 학생의 시위준비 과정을 포함하여 자세한 내용을 저서 <유고>에 상세히 기록했다.

항쟁 이후의 정치적 상황이 긴박했던 점도 항쟁 자체에 대한 관심을 멀어지게 만든 요인이다. 부마항쟁에 대한 대처방안을 놓고 권력층 강온파의 대립이 심각했다. 결국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면서 유신체제가 종식됐다. 이후에 12‧12 군사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5공화국 출범, 6월 항쟁이 이어지면서 부마는 조금씩 잊혀졌다.

교과서에서의 기술이 이를 보여준다. ‘부산과 마산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부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탄압하려 했다.’ (주)지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는 부마항쟁에 관해 2줄로 설명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에 대해 한 페이지 가까이 다루는 사례와 대조적이다.

대학생 배주연 씨(24)는 마산과 가까운 창원 출신이지만 부마항쟁에 대해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다”고 말했다. 대학생 박수빈 씨(24)는 그는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민주화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지만 ‘부산, 마산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만 들었다. 부산에서 20년 가까이 살았음에도 말이다.

부마항쟁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지만 한국 현대정치사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시춘 EBS 이사장(69)은 ‘제국은 외국의 침공보다는 내부의 균열로부터 무너진다’는 중국 고전을 인용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유신 체제의 내부균열을 초래해서 유신에 종말을 고한 직접적인 사건으로, 상당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차성환 상임위원은 “부마항쟁이라는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국민의 주인의식이 민주주의 수준에 걸맞게 진화했다”고 평가했다. 주인의식이란 국민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운명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참여하는 태도를 말한다.

부마항쟁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된다. 40주년 기념전시 개막식이 7월 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렸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송기인 이사장(82)은 이번 전시회를 “부마항쟁에 대한 외면과 기억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중 기꺼이 기억을 택하고자 한 용기”라고 소개했다.

▲ 화가 권산 씨가 자신의 작품 ‘3·15 의거탑 주변 시위’ 앞에 섰다.

전시에서는 민주투쟁선언문과 당시 사진을 포함한 일지 및 그림을 선보인다. 민중화가 권산 씨(57)는 ‘3·15 의거탑 주변 시위’를 제작했다. 그림의 총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장을 겨눈다. 손잡이 부분은 학생과 시민이 구호를 외치며 전진하는 모습으로 구성했다. 권 씨는 이렇게 말한다. “유신의 종말을 가져온 건 김재규의 총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부산과 마산 시민이 있었다.”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려는 노력도 계속됐다. 부마민주항쟁 특별법을 발의한 이주영 국회 부의장(69)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높이고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데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이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스토리오브서울> 취재팀이 찾아간 10‧16 부마항쟁연구소는 지하철 부산대역 1번 출구에서 100m정도 떨어졌다. 정광민 이사장은 서울에서 학생들이 취재하러 방문한 일은 몇 십 년 만이라며 환하게 웃으면서 다른 취재원을 연결해주는 등 적극 도왔다. 자신의 저서 <시월의 노래>와 <부마항쟁 그 후>를 선물하고, 인터뷰가 끝나자 사진을 먼저 찍자고 하더니 취재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유시춘 이사장 역시 경기 일산의 EBS 센터 사무실에서 취재팀을 반갑게 맞았다. 그는 한국 현대사, 특히 민주화과정에서 청년세대가 했던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저의 문학적 표현으로 청년의 빛이에요. 청년이 이뤄낸 거예요. 4·19, 5·18, 6월 항쟁. 전부 청년이 전위에 섰어요. 청년의 빛. 국민은 청년에게 빚을 졌고, 민주주의는 청년들이 쏜 빛으로 이뤄졌고. 청년이 깨어있고 연대하고 정의와 평등에 대한 갈망이 있으면 그 꿈은 이루어집니다.”

취재팀은 부마항쟁을 취재하면서 부모세대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동시에 질문과 고민을 갖게 됐다. 민주화된 한국사회에서 청년세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가 민주주의의 빛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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