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는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소재다. 내 머리 속에 지우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꽃보다 아름다워…. 마음이 아프다며 빨간 약을 가슴에 바르고,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어린이가 되는 어른.

이정순 씨(90)는 치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할 일을 스스로 정하고, 빨리 하지 않으면 못 견뎠다. 아침이면 매일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읽고, 텔레비전을 볼 때면 화면자막을 이면지에 받아 적었다.

꽤 먼 거리의 미용실을 혼자 걸어 다녔고, 분리수거와 빨래와 설거지를 능숙하게 했다. 다음날 일어나야 하는 시각을 전날 밤에 묻고, 아침마다 기자와 동생을 칼같이 깨워 학교에 늦지 않게 했다.

▲ 할머니가 텔레비전을 보며 받아쓴 자막

이상을 느낀 건 올해 초, 2019년 1월이었다. 묻는 말에 엉뚱한 대답을 했다. 빨래를 두 번 돌리고, 옷의 주인을 구별하지 못했다. 혼잣말을 하다 잠에서 깨면 여기가 어디인지, 우리 집이 맞는지 자주 물었다.
 
딸(기자의 어머니)에게는 “언니”라고 부르며 “부뚜막에 불 떼라” 했다. 지금 사는 곳은 아파트라 부뚜막이 없는데, 할머니 기억이 시골에 살던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 했다. 기자의 어머니는 “잘 해드리자”라며 할머니가 좋아하는 바나나와 만두를 한 아름 샀다.

할머니는 어느 날 자다 일어나서 식칼을 휘둘렀다. “저리 가. 저리 가.” 가족이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할머니는 방 모퉁이에 여자가 서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현관문 앞에 칼을 놓았다.

기자 가족은 할머니의 병을 구체화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치매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생각만 하면 짐작으로 끝나지만, 병명을 말하는 순간 현실이 될 것 같았다.

6월 초였다. 집에 안내문이 왔다. 60세 이상 모든 어르신을 대상으로 치매 선별검사를 무료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두들 받는 검사라며 6월 4일 경기 김포본동의 행정복지센터를 찾았다. 치매조기검진서비스(선별검사) 후 이상소견을 진단 받았다.

김포시 치매안심센터를 7월 30일 방문했다. 매주 화요일마다 전문의가 진료하는데 신청자가 많아 예약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간호사가 1시간 30분가량 진단검사를 했다. 결과지를 놓고 의사와 만나 소견서를 받았다.
 

▲ 할머니가 진단검사를 받는 모습

기자는 보호자 자격으로 할머니 옆에서 평소 증상 등 의료진의 질문에 대답했다. 결과는 ‘경도 인지 장애’ 의심. 초기치매로 가는 중간단계라고 했다.
 
의사 소견서를 갖고 8월 2일 협약병원을 찾았다. 사전에 예약하고 김포우리병원 신경1과를 찾아 컴퓨터 단층촬영(CT)과 혈액검사를 했다. 중위소득 120% 이하이면 지원대상이어서 초기 1회 검진비용이 무료였다.

결과는 질병코드 F001. 경도인지장애에서 초기치매로 넘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전문의 진단을 통해 뉴로페질정(알츠하이머 형태의 치매 증상 완화제), 에이프렉사정(신경 전달 물질 조절: 정신과 질환 치료), 신일폴산정(엽산)을 처방받았다.

김포시 치매안심센터를 8월 5일에 찾아가 환자로 등록했다. 필요서류는 처방전(치매코드, 치매약 기재), 가족관계증명서(상세), 통장사본(가족관계증명서에 있는 사람), 신분증(본인, 보호자) 등 네 가지였다.

할머니는 키와 몸무게를 재고 인식표에 넣을 사진을 찍고 지문을 등록했다. 인식표 및 지문등록, 치매약제비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위생소모품과 가이드북, 인식표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자신이 치매인 사실을 모르지만, 지원물품을 보며 아주 흡족해했다. 같이 사는 가족은 물론 동생들에게 전화해서 나라에서 노인에게 이렇게 잘한다고 말했다.

▲ 지원받은 물품. 인식표, 가이드북, 요실금팬티, 물티슈, 미끄럼방지 양말, 뇌 영양제, 욕실 매트, 보습로션, 파스

치매안심센터는 경증 치매환자의 인지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만 할머니가 센터까지 혼자 가기가 무리여서 신청하지 않았다. 가족끼리 치매노인 간호 및 보호 경험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이렇게 치매진단과 함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혜택을 받게 됐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에게 3단계 검진과정이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복지 시스템을 실감했다.

치매의심에서 확정까지 가족이자 보호자로서 모든 과정을 함께하며 느낀 점은 영화나 드라마가 현실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영화와 달리 러닝타임 내내 슬프고 지독하지만은 않았다.
 
진단검사 중 그림을 따라 그리는 순서가 있다. 네모, 겹쳐진 동그라미…. 할머니는 이런 저런 모양을 따라 그리다가 간호사에게 말했다. “종이 아깝게 이게 뭐하는 짓이유?”

집에 돌아와서 할머니는 멀쩡한 종이를 제대로 쓰지 않고 내버린 게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다고 했다. 그 책을 버릴 거면 달라고 하려다 참았다고 하자 우리 가족은 모두 웃었다.

동물이름을 말하라는 질문에는 “개, 소, 돼지. 이거 말고는 키운 것 없슈”라고 답했다. 간호사가 “아니 어르신, 키우신 동물이 아니어도 좋으니 아는 동물 최대한 많이 말씀해주시면 돼요”라고 했다. 할머니는 또다시 “알았슈. 개, 소, 돼지, 닭. 우리 뒤뜰에 키웠는데 지금은 털 날리고 더러워서 못 키워유”라고 대답했다.

슬픈 순간도 있다. 간호사가 몇 개 단어를 듣고 따라하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나 못 하겠슈. 예전에는 알았는데 이제 완전히 바카(ばか, 바보의 일본어) 됐네”라고 했다. 시무룩하게 말하는 모습에 눈물이 나려고 했다.

기자와 동생에게 할머니는 각별한 존재다. 맞벌이로 일을 하는 부모 대신 태어난 순간부터 20년이 넘게 키웠다. 동생은 할머니가 자신의 ‘눈물 버튼’이라고 한다. 할머니의 관한 일이면 사소한 일이어도 눈물을 글썽인다.

할머니는 작은 키에 충청도 사투리를 쓴다. 성품이 점잖고 귀여운 할머니를 가족 모두가 사랑한다. 할머니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듣는 일이 당연한 일상이 아니게 될까봐 가족 모두가 두려운 마음이다.

그러나 함께하는 지금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앞으로 치매진행을 늦추는 약을 먹으며 사라지는 기억을 붙들기 위해 싸울 것이다. 기자 가족은 치매환자 이전에 가족인 할머니를 위해 계속 곁을 지킬 예정이다.


▣ 치매에 도움을 주는 기관
보건복지콜센터 ☎ 129
치매상담콜센터 ☎ 1899-9988
보건복지콜센터(http://www.129.go.kr)
중앙치매센터(http://www.nid.or.kr)
우리동네 치매센터 찾기(https://www.nid.or.kr/info/facility_list.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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