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벽해(桑田碧海). 시애틀을 최근 다시 찾았을 때 떠오른 단어였다. 네이버 한자사전에 따르면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고사성어는 세상이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을 때 사용한다. 그렇다. 시애틀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명품도시로 21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40년 전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땅을 처음으로 밟았다. 1981년 여름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웨스턴 에어라인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시애틀이 에메랄드 도시답게 갓 내린 빗방울로 반짝 반짝 빛났다. 공항에 내려서 푸른 숲이 내뿜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가슴 속 깊이까지 시원했다.

▲ 시애틀 다운타운

미 서북부의 명문인 워싱턴대의 허스키 스타디움은 호숫가 바로 옆에 있다. 그곳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면 일군의 젊은 남녀가 7월의 화창한 날씨 속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보트를 타고 대학 옆 뱃길을 따라 줄줄이 섬과 호수와 바다로 둘러싸인 퓨젯 사운드(Puget Sound)로 나갔다.

워싱턴대 본관의 파란 잔디 위에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니, 캠퍼스 동남쪽에 있는 레이니어 마운틴이 위풍당당한 자태를 멀리서 드러냈다. 미 서북부에서 가장 높은 명산이다. 높이가 4392m로 북미대륙에서 30번째로 높다. 로칼 맥주 브랜드가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마운틴 레이니어라고 불린다.

당시 서울 시가지에서는 시위진압 장갑차가 연신 짙은 최루 연기를 뿜어대고 최루탄과 화염병 그리고 각목이 난무했다. 고국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라는 의문과 함께 육두문자가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 시애틀 근교에서 본 레이니어 마운틴

시애틀도 시애틀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1980년대 초 미국을 강타한 불경기에 도시가 활력을 잃었다. 살인적 인플레이션으로 새 차를 구매할 때 이자율이 18%였다. 전통적인 알래스카의 전진기지로서 역할도 시들해졌다.

당시 시애틀에 소재했던 타드라는 세계 제1의 조선회사는 하루아침에 공장폐쇄에 들어갔다. 한국의 용접공 임금이 시간당 1달러 남짓인데 시애틀에선 20달러에 육박했으니 노동집약적인 조선산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다. 지역경제를 지탱했던 산업으로는 비행기 제조업의 보잉사가 유일했다. 그마저도 세계적인 불경기로 허덕였다.

시애틀의 양대 산업 축이었던 조선업의 파산으로 직장 잃은 근로자가 늘어났다. 시애틀 다운타운에는 마약과 술에 취한 부랑자가 늘었고 밤에 다니기가 겁났다. 알고 지낸 교수의 집을 방문했는데 오일 쇼크의 여파인지 난방을 하지 않아 두꺼운 외투와 담요로 추위를 달래야 했을 정도였다.

그랬던 시애틀에 새 출구로 알래스카와 밴쿠버 그리고 포틀랜드를 연결하는 관광산업이 활성화됐다. 새로운 신화를 써가는 스타벅스 커피가 1971년 시애틀에 선보인 뒤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이어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시애틀에 터를 잡고 지구촌 컴퓨터와 정보산업을 지배했다. GAFA제국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아마존사가 들어서면서 시애틀의 다운타운 모습은 과거의 불경기를 말끔하게 걷어냈다. GAFA란 구글, 애플, 페이스북, 그리고 아마존의 첫 알파벳을 모은 조어이다. 

▲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가 5년 전에 시애틀 다운타운에서 첫 번째로 오픈했다. (위) 매장 방문객은 커피원두를 직접 볶고 가공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시애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빌 게이츠와 함께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업한 폴 가드너 앨런이다. 앨런은 세계적인 기업이 된 마이크로소프트사를 1980년대 초반에 떠나서 1986년 볼캔(Vulcan)이란 비영리재단을 설립한다.

그는 1988년에는 NBA 팀인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Portland Trail Blazers)를 매입하고 1997년에는 시애틀의 미식축구팀인 시호크스(Seahawks)의 구단주가 된다. 나아가 시애틀 다운타운의 낡은 건물을 사서는 도시재생 사업에 헌신한다.

그의 순자산은 2018년도에 203억 달러로 추정됐다. 포브스에 의해 전 세계에서 44번째로 부유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앨런 뇌과학연구소와 인공지능기구, 세포연구소를 설립했으며 20억 달러 이상을 대학을 포함해 야생동물과 환경 보호, 예술, 헬스 케어, 커뮤니티 서비스를 위해 기부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2007년과 2008년도에 연속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했다. 지금도 시애틀 주민은 다운타운 조경이 고인에 의해 바뀌었다고 기억한다.

앨런은 숙환이었던 암으로 지난해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동생 조디가 오빠의 인류애적인 기부와 지역사회 재생사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특별히 워싱턴대에는 그의 이름을 딴 폴 앨런 빌딩이 있다.

시애틀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대표적 인물이 윌리엄 에드워드 보잉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는 1881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독일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노동자로 시작해 자수성가해서 미네소타에서 목재업으로 부를 쌓았다.

예일대를 졸업한 보잉은 그가 8세에 죽은 아버지처럼 목재업에 종사했다. 서른 살이 채 안된 보잉은 그린우드 팀버사의 회장으로 보트를 디자인하기 위해 1909년에 시애틀을 방문했다.

한일한방 한 해 전이었던 당시 시애틀에서는 태평양 서북부의 개발을 고무하기 위한 알래스카-유콘-퍼시픽 엑스포지션이라는 국제적인 산업 박람회가 열렸다. 일본 해군은 시애틀 발전의 시발점이 된 이 박람회에 애소와 소야라는 순양함 두 척을 파견해 축하했다. 동시에 워싱턴대 교정에서 1909년 6월 4일에 일본 해군의 날 기념식을 가졌다. 

윌리엄은 이 국제 박람회에서 난생처음 비행기를 보게 됐다. 그리고는 하늘을 나는 비행사가 되어 본인이 주문한 비행기를 직접 조종한다. 그가 몰던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수리 부품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재촉했지만 더 일정이 늦어진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그는 비행기를 직접 제작하고자 했고, 1916년 7월 15일에 퍼시픽 에어로 프로덕트란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가 지금의 보잉사가 됐다.

미국은 1917년 4월 8일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보잉사는 미 해군으로부터 50대의 해군기를 주문받아 군용기를 제작했다. 이후로는 항공우편 서비스와 여행객을 나르는 유나이트 에어라인 서비스를 시작한다.

나중에 반독점법에 의해 비행기 제작과 여객 서비스는 나누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시애틀 남부에 대규모 토지를 구입해 보잉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공장 부지를 가진 세계적 기업이 됐다. 
                  
새로운 디자인의 비행기 제작은 라스베이거스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큰 도박이라 불린다. 피터 리니어슨 기자는 보잉 757 제작과정을 시애틀 타임스에 <그것을 날게하라>(Making It Fly)란 8부작 기사로 보도해 특집기사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탔다.

그에 따르면 757 프로젝트 디자인에는 1500명의 엔지니어와 보조인력 1500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새 비행기 디자인을 위해 6만 5000 건의 엔지니어링 이슈를 풀어나가야 했다. 서로 다른 9만 5000개의 파트 종류를 가지고 300만 개의 파트를 조립해야 하는 대규모 작업이었다. 새로운 디자인의 비행기 제작에는 원가만으로 15억 달러 이상이 들어간다고 한다.

리니어슨의 보잉757 제작의 시작부터 판매까지 전 과정에 대한 보도에 따라 퓰리처상 위원회는 설명 저널리즘(Explanatory Journalism) 분야를 새로 만들었다(David Garlock, Pulitzer Prize Feature Stories, 2003).

보잉 757는 이스턴 항공사의 주문에 의해 1981년에 제작되기 시작해 2004년에 단종됐다. 하지만 지금도 유나이트 에어라인스를 포함한 여러 항공사의 비행기로 하늘을 나는 중이다.

▲ 보잉 757 비행기

구글에 따르면 보잉사는 2018년에 여러 기종의 여객기 806대를 제작했고, 군용기 96대와 우주선 2대를 만들었다. 1년 총예산이 1000억 달러에 이르며 지난해 순수익만도 100억 달러다. 고용인 15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회사이기도 하다.

한국이 의류와 가발을 수출하기 시작해 1980년 초까지 미국시장을 석권했던 적이 있다. 당시 대한민국 시애틀 총영사관의 김욱 부영사는 “아무리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해도 비행기 몇 대 들여오면 그것으로 한국의 미국시장 총 수출액을 넘어섰다”고 회고한다.

시애틀이란 도시의 기원은 1851년까지 올라간다. 아서 데니를 리더로 하는 일군의 일리노이 출신의 이민자가 퓨젯 사운드의 동쪽에 있는 알키 포인트에 도착했다. 그들은 당시 도움을 준 인디언 추장 셀스(Sealth)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정착한 지역을 시애틀이라고 불렀다.

엘리엇 베이의 남쪽 입구에 있는 알키 포인트가 거주하기에 불편해 대다수 개척자가 베이의 맞은  편으로 이동해 지금의 시애틀 다운타운이 형성됐다. 알키 포인트에서 바라본 시애틀 야경은 장관이다. 이곳에는 여름이면 데이트를 하거나 짝을 찾는 젊은 남녀가 이태원이나 홍대 앞에서처럼 구름같이 모여든다.

초기 개척자는 주로 남자들로 구성됐다. 아서 머서라는 사람이 1864년 뉴욕에서 100명의 예비신부를 모집해 돌아왔다. 이 여성들은 머서 걸이라고 불렸다. 시애틀 옆에 있는 머서 아일랜드란 도시가 예비 신부를 모은데서 유래한다.

서부개척 시대에 북태평양철도(Northern Pacific Railroad)의 유니온 스테이션이 시애틀 다운타운에 세워진다. 타코마와의 경쟁에서 이겨 1888년에 이 터미널에 첫 기차가 들어왔다.  이와 함께 광산업자가 시애틀로 모여들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알래스카 금광 개발에 나서기 위해서이다.

다운타운에는 골드 러쉬와 함께 광부가 되고자 하는 근로자가 모여 들었다. 시애틀은 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제공하는 알래스카의 전진기지가 됐다. 이때 대규모 화재가 발생해 다운타운 건물이 모두 탔다. 역설적이게도 이 대화재 이후 시애틀에 건설 붐이 일어나 1889년에 2만 5000명이던 인구가 4만 명으로 늘어났다.

▲ 시애틀 다운타운 앞 바다인 퓨젯 사운드

현재 73만 명인 시애틀의 인구증가 추세가 놀랍다. 2010년 이후 최근 10년 동안 19%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미국의 50대 도시에서 텍사스대가 자리한 오스틴시를 제치고 가장 빠르게 인구가 늘었다.

이 기간에 시애틀 인구가 12만 명 늘었다. 한 해만을 따졌을 때는 2016년 7월 1일부터 2017년 7월 1일까지 2.5%의 인구 증가율을 보였다. 같은 기간에 조지아주 애틀랜타시에 이어 인가증가율이 두 번째로 높다.

시애틀과 타코마 그리고 벨뷰 지역을 아우르는 시애틀 메트로폴리탄 거주 인구도 물론 늘었다. 미 인구통계청에 따르면 1980년에 180만에서 2019년에 400만으로 지역인구가 2배 이상 늘었다.

시애틀 메트로폴리탄은 지금도 워싱턴주 전체 인구의 반이 거주하는 붐 타운이다. 미 서북부 4개 주인 워싱턴, 오레곤, 아이다호, 몬태나를 연결하는 서북부의 거점도시로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다음에는 시애틀 다운타운의 변화된 모습과 스페이스 니들, 그리고 허스키 스타디움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를 가진 워싱턴대를 방문한다. 이어서 시애틀의 터줏대감인 한인 올드타이머와 미국 주류사회로 진입하는 뉴 프론티어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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