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길음동의 한미구둣방.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나 손익배 씨(82)가 건물옥상에서 웃으며 내려왔다. 잠금장치를 풀고 불을 켜자 가죽과 공구가 드러났다. “작업실이 많이 좁지요?” 기자를 맞는 그의 손에는 굳은살과 상처가 가득했다.

예전과 비교하여 고객수요가 달라졌냐는 질문에 그는 이용객의 세대차이가 뚜렷한 변화라고 말했다. 구둣방 위치를 아는 단골이나, 구두를 즐겨 신는 노신사만 가끔 들른다고 했다.

“1980년대에는 여대생이 구둣방을 가득 채웠어요.” 손 씨의 말로 보아, 당시 대학생이 나이가 들어서도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젊은 손님은 거의 오지 않는다고 한다. 가장 젊은 사람이 40대라는 설명에서 변화를 느꼈다.

▲ 한미구둣방 모습

손 씨는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90% 정도는 수제화를 신었다고 했다. 구두수선사가 모인 ‘혁공노동조합’에 4500명이 있었을 정도. 하지만 그는 “요즘 사람은 다 운동화 신어요”라며 구두의 시대가 갔음을 아쉬워했다.

국내에서 제일 활발하던 성동구 성수동의 구두공장이 800~900곳에서 요즘은 400여 곳으로 줄었다. 손 씨는 젊은이 중에서 구두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겠냐고 말했지만 당분간은 적게라도 남아있을 것이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후에 도넛을 많이 먹는 구두 수선사가 부러워서 기술을 배웠어요. 그 때 내 나이 15살이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했지만 선생님도 없었고 배울 공간도 없었다. 처음에는 도넛을 팔았는데, 남은 빵을 모두 사주던 단골을 보면서 구두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구두를 수선하며 도넛을 마음껏 먹었다. 또 카바레로 춤을 추러 다니다가 ‘찬찬찬 사교댄스학원’ 원장이 됐다. 24시간 운영한다던 구둣방 문이 닫힌 이유를 알았다.

▲ 손익배 씨가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기자는 연세대 신촌캠퍼스의 정문 쪽에 있는 구둣방도 찾았다. 반 평 정도여서 수선사와 손님이 1명씩 들어가면 발을 디딜 틈이 없어진다. 김동규 씨(68)는 여기서 28년째 일한다.

제화공장을 다니다가 퇴직 후 생계를 위해 구둣방을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시 조례에 따르면 운영자 본인 및 배우자의 자산이 3억 원 미만인 사람만 인도 위 구둣방과 가판대를 운영할 수 있다. 손님은 많지 않아서 2, 3시간에 1명 정도라고 한다.

“수입구두 업체에 보내기 보다는 이렇게 기술을 가진 분이 훨씬 빠르고 저렴하고, 기다리는 동안 소통할 수 있어서 인간적이에요.”

이화여대 김민선 씨(22)가 이 구둣방을 3년째 이용하는 이유다. 하지만 김동규 씨는 “손님이 많아야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며 인터뷰 내내 생계를 걱정했다.

언제까지 일을 계속 하겠냐고 묻자 김동규 씨는 “송해 씨가 나랑 10살 정도 차이 나니까 10년이면 되겠지”라면서 앞으로 자주 놀러오라고 했다. 1시간 이상 대화를 하는데 손님은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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