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2019년 6월 말, 조국 민정수석의 법무부 장관 내정설이 나오자 검증을 시작했다. 사회부 법조팀의 황성호 신동진 이호재 김동혁 장관석 등 기자 5명이 담당했다.

자녀문제가 있다고 처음부터 예상하지는 않았다. 신 기자는 “모든 취재는 공개된 자료를 단서로 한다. 자료에 따라 취재방향이 정해진다”고 했다. 황 기자는 언론 인터뷰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글에서 단서를 찾다가 서울대 교수 시절의 발언에 주목했다.

▲ 동아일보 법조팀이 한국기자상을 받고 기념촬영을 했다.

“나의 진보적 가치와 아이의 행복이 충돌할 때 결국 아이를 위해 양보하게 되더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대담집 ‘진보집권플랜’을 발간하면서 경향신문과 했던 인터뷰(2010년 12월 7일자)의 일부다.

당시 조국 교수를 만났던 이종탁 기자(현재 신한대 미디어언론학과 교수)는 황 기자가 주목한 부분에 대해 “인터뷰 주제(책자 발간)와 거리가 있는 사적인 이야기였다. 그래도 흥미로운 대목이어서 와이드 인터뷰 기사에 붙는 소품인 작은 상자기사로 넣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자녀문제를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는데, 기사 속의 한 마디가 10년 뒤 특종을 탄생시킨 취재단서가 됐다는 점에 작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조국 교수가 자녀문제를 언급한 기사(출처=경향신문)

취재팀은 딸의 신상부터 찾았다. 처음에는 이름조차 불분명했다. 어느 매체가 조민희라고 보도해서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다.

출신 학교(한영외고와 고려대) 정보가 전부였다. 페이스북 등 SNS를 뒤지고 한영외고 졸업생을 찾았다. 이 기자는 “조 씨와 비슷한 나이대의 한영외고 출신 중 조민희라는 이름이 없었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이름(조민)을 알아냈다.

이름과 출신학교로 검색을 하다가 의학전문대학원 자기소개서를 찾았다. 조민 씨가 인터넷 사이트 ‘해피캠퍼스’에 올린 자료였다. 취재팀은 동일 ID가 판매한 자개소개서 및 이력서 6통을 8만 4500원에 구입했다.

‘단국대 의료원 의과학연구소 소속 인턴쉽의 성과로 논문에 이름을 올렸다’는 문장이 눈을 멈추게 했다. 외고 학생이 의학논문의 저자가 됐다? 취재팀은 논문을 찾기 시작했다.

한국기자상 공적설명서를 보면 취재팀은 1주일 내내 도서관과 논문검색 사이트를 뒤졌다. 이름의 두 음절이 겹치는 저자가 워낙 많아서 무엇이 조민 씨의 논문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검색 끝에 조민 씨가 자소서에서 언급했던 논문을 찾았다. 또 다른 난관이 기다렸다.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작성한 병리학 분야였기 때문이다. 검색을 해도 뜻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용어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논문은 A4용지 6쪽 분량. 제목부터 어려웠다. 출산 전후 허혈성 저산소뇌병증(HIE)에서 혈관내피 산화질소 합성효소 유전자의 다형성. 내용분석을 도운 병리학 전문가들은 고교 교과과정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병리학 개념으로 1저자 등재는 무리라고 했다.

고등학생이 1저자로 등재될 수 있을까? 이름이 가장 앞에 나오는 1저자는 논문이나 연구에서 기여도가 가장 큰 사람이 대부분이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리학회의 당시 규정으로도 석연치 않다는 걸 알아냈다.

논문검증만큼 중요한 작업은 1저자가 조국 전 장관의 딸인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몇 년생이고 한영외고 출신인지는 논문만으로 알 수 없었다.

취재팀은 공동저자를 하나씩 추적했다. 신 기자는 “(논문 속 1저자와 조민 씨가) 동일인물이라는 진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논문이 나온 2009년과 취재를 하는 2019년. 시차가 10년이어서 공동저자를 모두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이런 작업은 신 기자와 황 기자가 8월 19일, 책임저자인 장영표 교수를 만나면서 완성된다. 논문의 조 씨가 조국 전 장관의 딸이라고 장 교수가 인정했다.

황 기자는 장 교수가 체념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10년대 중반부터 논문에 자녀를 저자로 끼워 넣는 일이 문제가 되다보니 본인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두 기자는 데스크에 보고하자마자 다시 장 교수를 만났다. 신 기자는 “시간이 지나면 진술이 오염될 수도 있고 관계자들과 말을 맞출 수도 있고 기자들이 찾아왔다며 전문가의 손길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첫 기사는 8월 20일자 1면과 3면에 실렸다. 조민 씨가 2008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대한병리학회에 영어논문을 제출, 이듬해 제1저자로 등재됐다는 사실과 장 교수와의 일문일답.

▲ 조국 전 장관 검증의 국면을 바꾼 동아일보 1면(왼쪽)과 3면

황 기자는 “몇 달 동안 잠을 거의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을 2019년 9월에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 이 기자는 “잠깐 축하했어도 마음을 놓고 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후속취재로 바빴기 때문이다.

데스크도 마찬가지. 기자들이 취재하고 보고한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 기자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잘못 나간 내용은 없는지 확인하는 선배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보도가 정확한 만큼 조국 전 장관 측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팀장 부장 부국장 편집국장을 ‘좋은 선장들’이라고 했다. 정원수 사회부장 등 데스크는 표현에 특히 신경 썼다. 비난하거나 비꼬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제된 문장에 담아 사안을 독자 스스로 판단하도록 했다. 

반향은 즉각적이고 컸다. 첫 보도가 나간 8월 20일, 단국대는 연구논문 확인에 미진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검찰은 1주일 만인 8월 27일 수사에 착수했다.

부모가 인맥과 재력을 동원해 자녀의 입시와 사회진출을 돕는 사례가 드러나자 공정(公正)이 시대담론으로 떠올랐다. 서울대와 고려대를 포함한 대학가에서는 8~9월에 촛불시위가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입전반을 재검토하라고 9월 1일 지시했고, 대한병리학회는 조민 씨 논문을 9월 5일 직권 취소했다. 다른 이슈와 맞물리면서 조국 전 장관은 10월 14일 사퇴했다. 청년층의 분노가 특히 심했다.

“(고교) 유학반에서 논문 품앗이가 이뤄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덤덤하다. 외고 출신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심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 모 씨‧한영외고 출신)

“학원에 다닌 적도 없고 과외 한 번 받지 못했다. 혼자만의 힘으로 이 학교에 왔다.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서 그간의 노력에 허탈감을 느꼈다.” (정 모 씨‧고려대 환경생태공학과 12학번)

“입시비리 중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교육계가 충분한 논의를 통해 중장기적인 대책을 세워나갔으면 좋겠다.” (김주형 씨‧인제대 의학과)

보도는 기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 기자는 “조민 씨가 일반인이라 기사를 쓸 때 걱정되기도 했다. 무고하게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황 기자에게는 검증을 가장 확실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됐다. 이미 검증한 내용을 또 검증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김 기자는 “기사는 늘 권력층을 향해야 하는데 그 점이 잘 실현됐다. 정의의 기준에 대해 다시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 뜻깊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박희태 법무부 장관 자녀가 대학에 편법으로 입학했고 박양실 보건사회부(현재 보건복지부) 장관이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사실을 단독보도했다. 박희태 장관은 7일 만에, 박양실 장관은 10일 만에 사퇴했다.

당시 보도로 동아일보는 제25회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위 공직자 검증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해 언론의 인사검증이 관행으로 자리 잡고, 국회가 인사청문제도를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