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25) 씨는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용산구의 경리단길에 갔다. 2019년 9월 영화 <어거스트 러쉬>, <비긴 어게인>, <원스> 등 음악과 사랑에 관련된 넷플릭스 영화 콘텐츠를 시청한 사람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밴드 기타리스트인 모임장의 도움으로 OST를 직접 개사하기도 했다. 이 씨는 “이곳에서는 내가 하는 일,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 조금 더 진솔한 나의 모습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하며 나와 너의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참여 이유를 밝혔다.

넷플릭스가 미디어 소비 형태와 모임을 바꾸는 중이다. SBS가 4월 14일 보도한 나스미디어의 ‘국내 인터넷 이용자 OTT 이용률’ 조사에 따르면 국내 인터넷 이용자 4명 중 1명(28.6%)이 넷플릭스를 이용한다.

성장세도 가파르다. 2019년 유료 동영상 서비스 이용자 조사에서 34.9%를 기록했는데 2020년에는 58.8%로 늘었다. 퇴근 후 TV 앞에서 시간을 보내던 시청자는 이제 OTT 서비스를 켠다.

대생 박민지 씨(23)는 1주일에 5시간 이상 넷플릭스를 켠다. 자주 보는 이유를 묻자 “콘텐츠마다 스토리가 신선하고 탄탄해서 계속 보게 만든다”고 답했다.

‘넷플릭스를 보는 날에는 연희동에 가야한다’(이하 넷플연가) 창업자인 전희재 대표(28)를 4월 3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카페에서 만났다. 넷플연가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영화 콘텐츠를 기반으로 모임을 진행하는 멤버십 커뮤니티다.

학생, 스타트업 최고경영자(CEO), 의사, 음반 기획사 대표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모인다. 마포구 합정동, 서대문구 연희동, 종로구 대학로, 용산구 경리단길에서 매주 이야기를 나누거나 글쓰기, 운동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 넷플연가 홈페이지

전 대표는 5명 규모의 스타트업 ‘세븐픽처스’를 운영 중이다. 그는 자판기를 누르면 시, 소설이 출력되는 ‘문학자판기’, 제목과 작가를 가린 채 전시를 진행하는 ‘100명 블라인드 포스터전’ 등의 이벤트를 기획했다.

그는 혈연과 학연 중심의 공동체가 점점 바뀔 것이라고 생각해 2019년 3월 넷플연가를 만들었다. 밀레니얼 세대인 2030 직장인이 쉽게 접하기 힘든 사랑, 신념, 글쓰기를 접하고 공유할 공간을 만든 셈이다.

전 대표는 “밀레니얼 세대는 더 이상 한자리에 모여서 TV를 보지 않는다. 퇴근 후 자연스럽게 넷플릭스를 보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라며 “콘텐츠를 매개체로 모여 때로는 진지하지만 가볍고 쓸모없는, 꽉 찬 이야기를 나눈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답했다.

넷플연가는 하루를 넷플릭스로 마무리하는 세대의 공통 관심사이자 고민거리를 간파했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2020>에 따르면 현 시대는 다양하고도 유연한 자아를 갖게 되는 멀티 페르소나 시대다.

전 대표는 “일상생활에서 친구나 회사 사람을 만나면 즐거울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친구는 아니지만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모여 평소에 하지 못했던 진지하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었다”고 답했다.

▲ 넷플연가 모임(출처=넷플연가 인스타그램)

모임은 회당 약 3시간, 매주 1회씩 모두 4회를 기본으로 진행한다. 3개월에 15만~20만 원을 내면 참여할 수 있다. 모임장 1인과 구성원 12명이 진행한다. 기자가 모임에 참여하려 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다.

넷플연가의 대표 프로그램으로는 <500일의 썸머>를 보고 함께 만드는 사랑과 연애, <블랙미러>를 보고 만드는 인터랙티브 콘텐츠 워크샵,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 속 멘들스케이크를 직접 만드는 모임이 있다. 이번 시즌(3개월)에도 약 30개의 모임에 200~300명이 참여한다.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참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 대표는 편리함을 이유로 꼽았다. 그는 “좋은 대화를 나누려면 준비된 질문, 커리큘럼, 장소가 필요하다. 모임의 규칙, 모임장, 사람을 모으는 작업은 개인이 하기에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모임에 참여했던 이지은 씨는 “일상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주제로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특색있는 주제별로 모임을 하니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즐거운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참여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참가자 후기(출처=넷플연가 인스타그램)

장유리 씨(22)는 <블라인드 사이드>, <스텝업> 등 운동과 관련한 영화 모임에 참여했다. 2019년 8월 당시, 운동에 관심이 많아 깊은 대화를 하고 싶은데 주변에는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장 씨는 “친한 사람과 대화할 때는 일상적인 내용에 밀려 깊은 대화를 나누기 힘든 경우가 많다”며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깊게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친한 사람보다 오히려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할 기회를 찾게 되는 것 같다”고 답했다.

장 씨는 인간관계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이 넷플연가를 찾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평소와 다르게 행동해도 괜찮고 모임 이후에 만남을 지속할 필요가 없어 솔직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단점은 없었는지를 묻자 그는 “소수의 인원이 함께하고, 모임이 100% 모임장에게 달려 있다 보니 일정이나 장소 변경이 다소 잦았다. 학생 입장에서는 가격대도 조금 부담되긴 했다”고 덧붙였다.

인스타그램에서 ‘영화클럽’, ‘영화모임’, ‘소셜살롱’ 해시태그를 검색한 결과 국내에서 영화를 매개로 생긴 커뮤니티는 넷플연가, 해냄살롱, 담화관, 컴온뮤비, 프리즘 시네살롱, 시네마비 등 10여 개가 있다.

이들 중 넷플릭스라는 하나의 서비스에 초점을 맞춘 커뮤니티는 넷플연가가 유일하다. 해외 사례를 찾기 위해 구글에서 검색했으나 비슷한 사례는 찾을 수 없었다.

성용준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48)는 넷플연가에 대해 “여러 자아(multiple self) 중 적절한 자아를 표출하는 방식은 예전부터 있었다”며 “관심기반의 모임에서는 관심사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헤어지므로 앞으로도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모임은 더 많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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