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는 1936년 8월 26일 경상남도 거창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독문과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포기했다. 10대 중반 왼쪽 무릎에 생긴 결핵성 관절염 때문이다. 그로부터 5년 뒤, 고졸 학력으로 한국일보에 입사한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가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1958년 한국일보 인사 담당자가 장기영 사주를 찾았다. “묘한 놈이 하나 있습니다. 고졸인데 영어시험에서 1등을 했습니다.”

전체 시험에서는 8등에 그쳤다. 최종에서 3명을 뽑는데 2배수인 6명까지가 면접 대상자였다. 그러자 장기영 사주가 3배수를 뽑아 면접을 보자고 했다. 묘한 놈의 진짜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들어서자마자 면접관들은 영어로 질문을 퍼부었다. 김영희 대기자의 발음은 엉망이었지만 고급문장으로 맞받아쳤다. 관절염을 치료했던 부산 서면의 스칸디나비아 3국 야전병원에서 영어를 익힌 덕분이었다. 그렇게 22살의 김영희는 한국일보 8기 수습기자로 합격했다.

1963년 11월 23일 밤. 5년 차 외신부 기자 김영희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피격 소식을 싣는 특종을 했다. 국내 언론 중 한국일보가 유일했다.

주요 뉴스를 알리는 텔레타이프 소리를 야근 도중에도 놓치지 않은 덕이었다. 그는 관훈저널 2007년 봄호 미니회고록에서 “테이블 위에 펼친 조선일보 1면에는 케네디의 ‘케’자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취재 없이 쓴 글을 보고 나는 지금도 쓴웃음을 짓는다.” 과연 현장을 고집했던 김영희 대기자다운 생각이다. 그로부터 2년 뒤 중앙일보 창간 요원으로 스카우트됐다.

그는 골프와 등산을 좋아했다. 좋아하던 걸 어느 날 끊었다. 이유는 단 하나,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주말에 책을 읽어야 하는데 어떻게 골프를 쳐. 노력한 만큼 결과는 글에 담기기 마련이야.” 2008년 그의 기자 생활 50주년 기념 사보 인터뷰에 담긴 말이다.

중앙일보 허남진 대기자는 1주일에 한 번은 꼭 김영희 대기자의 사무실을 들렀다. “사무실에 가면 라운드 테이블이 있어요. 그 위에 영자신문이며 책이며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 하여튼 책이든 신문이든 컴퓨터든 뭘 꼭 들고 있었어요. 집에서도 그러나 싶을 정도로.”

박영애 소설가(76)는 53년을 함께 살았다. “집에서는 책을 더 읽지요. 드라마도 안 봐요. YTN 뉴스를 제일 열심히 보고요.”

부부는 일본을 자주 찾았다. 주목적은 일본 산세이도 책거리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책을 한 가득 사서 가방에 담아 출국장으로 가면 공항 직원들이 “그게 무엇이냐”고 매번 물었다. 그럴 때마다 박영애 소설가는 웃으며 “골드바(gold bar)데스”라고 답했다.

직원들이 가방을 열어 확인하더니 덩달아 웃었다. “‘다른 사람에겐 그냥 책이겠지만 우리한테는 이게 골드바다’라고 했지요.” 그 이후로 “골드바 사러 갑시다”는 부부만의 암호가 됐다.

“어디서 봤노.” “어디서 읽었나.” “어디에 나오나.” 대기자의 입에서 자동처럼 튀어나오는 말들이다. 뒤를 잇는 말은 “그 책 좀 빌려줄래?”다.

하루는 박정찬 고려대 교수(66)와 미디어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도 김영희 대기자는 “최근에 그거와 관련해서 책 읽은 거 있어요?”하고 책을 빌려 갔다.

“돌려받아도 그 책 못 볼 거예요. 노트를 너무 많이 해놔서.” 박정찬 교수는 김영희 대기자를 메모광이라고 소개했다. “책에다가 노랑 형광펜으로 밑줄을 죽죽 그어놓고 빨간 펜으로 노트를···.”

▲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펜의 흔적

모나미 0.3㎜ 빨간색 수성 펜이 트레이드마크였다. 그의 책을 들여다보려고 수소문했더니 정용수 기자가 도움을 줬다.

3년 전쯤 빌려줬다며 보여준 책은 소설이었다. 가상의 제3차 세계대전을 묘사한 <The Third World War: August 1985>라는 제목. 대기자는 소설조차도 그냥 읽지 않았다. 빨간 펜을 들고서 곳곳에 밑줄을 치고, 여백에 메모를 하며 읽었다.

글씨체는 큼지막해 알아보기 쉬웠다. 낯선 영어 단어는 동그라미를 치고 그 옆에 한글로 뜻을 적어뒀다. 책을 읽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여백에 연결선을 긋고 메모했다.

‘There were no telephones and no electricity(전화기도 전기도 없었다)’라는 문장 아래에 “핸드폰은?”이라고 적은 빨간 글씨가 보였다. 재난대응본부가 빠르게 구호 지시를 내렸다는 대목에선 ‘within minutes of the strike(타격을 받은 지 몇 분 이내에)’라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신속한 대응!!” 이라고 썼다.

손때가 묻은 책 1400권 정도가 2월 15일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 기증팀 문현주 사서 주사보는 “전 후학이 유용하게 이 자료를 이용했으면 좋겠다는 고인의 뜻이 있어 유가족이 국립도서관으로 기증을 결정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김영희 대기자의 책은 하반기 즈음부터 도서관에서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그는 2003년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3개월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지만 부인은 오히려 담담했다.

“췌장암 판정을 받았을 때 ‘내가 무슨 복으로 과부가 되냐’고 그랬어요. 그렇지 않다고. 갈 사람 아니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의사가 굉장히 이상한 얼굴을 하더라고.” 그렇게 17년을 병마와 싸웠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박정찬 교수는 “더이상 목소리가 안 나온다”던 마지막 전화를 기억한다. 배명복 기자는 휘청휘청하면서 회사 복도를 지나던 대기자의 모습을 기억한다. “어쩔 땐 바람 불면 쓰러지시겠다 싶을 때도 있었어요.”

김영희 대기자는 기자 생활 59년을 마무리하며 2017년 말에 중앙일보를 퇴직했다. 그러나 관훈저널 2018년 여름호에서 “언론사 퇴직이 언론계 은퇴는 아니다”고 말했다. 퇴직 이후에도 책을 읽고 글을 쓰기를 계속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기아자동차 국내사업본부 1층 카페에서 ‘미스터 조’를 만났다. 김영희 대기자는 바리스타 조상곤 씨(32)를 그렇게 불렀다. 퇴직 후 대기자의 또 다른 기자실이었다.

매일 아침 9시 카페에 출근 도장을 찍고 매번 같은 자리로 향했다. 전용 좌석은 카페 한가운데. “평소 저희 카페가 정말 소란스러운데 그 와중에도 꼭 사람이 몰리는 이 중앙테이블에 앉아 기사를 쓰셨어요.”

▲ 김영희 대기자는 흰색 테이블(왼쪽)에서 기사를 쓰고 검은색 테이블에서 책을 읽었다.

옆의 검은색 테이블은 책을 읽을 때 애용했다. “어르신이 저기서는 책 읽을 때가 더 많았어요. 의자 하나에 앉아서 신발을 벗고 다른 의자에 다리를 올리셨어요. 그 채로 몸을 뒤로 기대서 책을 보셨죠.”

그는 아이스 라떼를 즐겨 마셨다. 날이 추워지면 따뜻한 라떼를 주문했다. 브런치를 좋아한다며 점심을 샌드위치로 대신했다. 조 씨는 건강을 고려해 “채소를 정말 많이 넣어 만들어 드렸다”고 했다. 김영희 대기자는 온종일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기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일어섰다.

조 씨는 집중할 때마다 보이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살아있는 눈빛이었어요. 힘이 실린 눈빛으로 본인 일에 빠져들면 아무리 시끄러워도 주변 한 번을 안 돌아보세요. 기사 쓰거나 책 읽거나. 딱 그 두 가지만 하셨어요.”

화장실을 가는 순간에도 노트북을 옆구리에 꼭 끼고 갔다. “화장실에 항상 들고 가셨어요. 누가 가져갈까 봐. 정말 본인 몸처럼 생각하시더라고요. 어르신이 지금까지 써둔 글, 모아둔 자료들이 거기 다 들어 있으니까요.”

김영희 대기자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나를 지탱하는 힘은 글을 쓰는 거다. 내가 펜을 놓으면 그날 나는 죽는다.” 한평생을 읽고, 뛰고, 쓰기만 했다. 그는 본투비(born to be) 저널리스트였다.

 

▣ 김영희 대기자 약력

1958년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 1965년 중앙일보로 옮겨 워싱턴 특파원, 수석논설위원, 편집국장을 지냈다.

또 관훈클럽 총무와 신영기금 이사장, 대통령 통일고문회의 고문을 역임했다.

미국 조지메이슨대 철학과를 졸업, 미주리대 언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대 언론대학원 국제보도과정을 수료했다.

삼성언론상, 장지연언론상, 홍성현언론상, 중앙대학교 언론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워싱턴을 움직인 한국인들> <페레스트로이카 소련기행> <마키아벨리의 충고> <소설 하멜>이 있다.

2003년 단편소설 <평화의 새벽>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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