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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1호 대기자 김영희를 말하다 (상)

기사승인 2020.05.24  15:4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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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가 KTX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2017년 봄이었다. 3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대구 공군기지.

‘동북아 최강의 전투기’란 별명이 붙은 F-15K를 직접 둘러봤다. 전투기 조종석을 옮겨놓은 듯한 시뮬레이터에도 백발을 휘날리며 올라탔다. 그의 나이 81세였다.

중앙일보 정용수 기자(48)가 이날 동행했다. “기자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게 그분의 지론이었죠. 전투기를 한 번 봐야겠다고 하셨어요. 당신이 직접 봐야 직성이 풀렸던 거죠.”

▲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출처=기자협회보)

그는 국내 제1호 대(大)기자였다. 1995년 중앙일보가 국제보도 강화전략의 일환이라며 ‘국제문제 대기자’란 직책을 만들었다. 외신부장, 워싱턴특파원, 편집국장, 수석논설위원까지 역임한 후였다. 어찌 됐든 대기자도 기자다. 그의 지론대로라면 기자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김영희 대기자는 문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출장을 떠났다. 그곳에서 외국 저명인사를 인터뷰해 칼럼을 썼다.

중앙일보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기사 모음 서비스 ‘기자페이지’를 들여다보니 대기자 타이틀을 달고 쓴 칼럼이 대략 670건. 1998년 5월부터 ‘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를 시작으로, ‘김영희 칼럼’을 거쳐 ‘김영희 대기자의 퍼스펙티브’로 독자를 만났다.

칼럼에는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다. 중앙일보 자문위원인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75)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양반이 맨날 하는 얘기가 ‘국제문제는 한국의 입장에서, 한국 문제는 국제적인 시각에서 본다’였지요. 늘 그런 틀을 가지고 글을 썼어요.”

이를테면 독일 통일의 한계를 꼬집어 한반도의 통일 준비에 시사점을 던지는 식이다. 2014년 11월 18일자 <독일 통일 25년, 내적 통합은 진행 중> 기사에서 그는 여전히 진행 중인 독재유산청산을 언급하며 이렇게 썼다.

“여기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이 배울 교훈이 있다. 그것은 통일 후 동서독인들의 화해와 통합이 동독 파워엘리트 처리의 대전제라는 사실이다. 보복보다는 관용을 통한 화해(가 필요하다).”

이 칼럼을 쓸 때도 현장에 있었다. 베를린에서 직접 목격한 독일 통일 25주년 행사 묘사로 기사의 운을 뗐다.

“기온 섭씨 10도. 음산하고 쌀쌀한 날씨인데도 100만 명의 인파가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밟으면서 (중략) 그날의 감동을 되새겼다. 군데군데 설치된 무대에서는 록밴드들이 역사적인 이날을 축하하러 몰려든 독일인들의 흥을 돋웠다. 그들은 무질서하게 춤을 췄다.”

현장을 누비지 못할 때는 취재전선의 후배를 불러 묻고 또 물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통일부를 출입하는 정용수 기자를 불러다 앉혔다.

“현장을 본 사람을 불러다가 A부터 Z까지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물으셨어요. 저에겐 보통 정상회담 현장···. ‘이 사안의 실제 배경은 무엇이냐’고 자주 물으셨죠.”

책을 칼럼에 인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영희 대기자는 책만 보고 기사를 쓰지 않아요. 꼭 저자를 직접 만나거나 전화하거나 메일을 보내요. ‘당신이 책에 이렇게 썼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냐’고 묻지요.” 글에서 ‘땀 냄새’가 난다고 김민환 교수가 말한 이유다.

김영희 대기자는 동남아 순회특파원, 워싱턴특파원을 지내며 많은 인터뷰를 했다. 신문과 방송 2009년 2월호에서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로 역사학의 거장 아널드 토인비, 베트남의 전쟁영웅 보 구엔 지압 장군,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를 꼽았다.

“인터뷰 준비는 항상 200% 한다는 각오다.” 신문과 방송 1999년 7월호에서 이렇게 밝혔다. 밤을 새서라도 인터뷰이의 책과 논문, 기사를 섭렵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를 인터뷰할 때, 쓴 책을 다 읽고 생가를 찾아가 누이동생까지 만났다.

200%의 노력 덕분일까. 그간의 기자경력에서 나온 노하우일까. 그의 인터뷰는 어딘가 남다르다. 중앙일보 유지혜 기자(40)는 2014년부터 김영희 대기자의 인터뷰에 자주 배석했다. 3년간 10개가 조금 넘는 인터뷰를 함께 했다. 
질문은 짧으면 한 줄, 길어도 두 줄을 넘지 않았다. 그래도 상대의 답변은 술술 나온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질문 자체가 뾰족해서다. 핵심을 찌른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많이 준비해오세요. 상대가 불편해할 질문도 서슴지 않으셨죠.”

2014년에는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과 단독인터뷰를 했다. 윤 장관은 특정 언론사와 독점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기에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기회였다.

첫 질문부터 직격탄을 날렸다. “장관께서 너무 강경한 대일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제가) 비판 해왔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여기에 윤 장관이 내놓은 답변은 10줄짜리 8문장.

중앙일보 배명복 대기자(60)는 1984년 수습기자와 편집국장으로 김영희 대기자를 처음 만났다. 33년의 세월이 흘러 그의 뒤를 잇는 대기자가 됐다. 배명복 기자는 김영희 대기자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입을 앙다물고 딱 쏘아보는 때가 있어요.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 중 이치가 안 맞는 얘기가 있으면 약간 노려보는 듯하다가 콱. 상대방이 아주 뜨끔하죠.”

질문은 거침이 없지만 취재원에 예의는 확실히 지킨다. 기사를 보면 인터뷰 질문은 모두 경어체다. ‘~하시는지’와 같이 말끝을 흐리는 법이 없다. 마지막은 항상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로 끝난다.

유지혜 기자는 “경어체로 기사를 작성하면 100자에서 110자 더 늘어나고 끝인사는 50자 정도를 차지한다”고 했다. 지면이 아무리 부족해도 이 두 가지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쉼 없이 사람을 만나고 끝까지 현장을 놓치지 않았던 김영희 대기자는 2020년 1월 15일 별세했다. 62년 기자 생활에 마침표가 찍혔다. 향년 84세.

 

 

 

 

김지윤 기자 storyofseoul2017@gmail.com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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