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42년 태어나 초등학교 때 6.25 전쟁을 겪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4.19 혁명이 일어났다. 시위에 참여했던 친구 이한수의 죽음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껴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다섯 차례의 투옥, 열두 차례의 구류로 7년간 복역했다. 수감 생활 중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축소를 폭로했다. 14~16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2015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을 5월 29일 서울 종로구의 카페에서 만났다. 지하철로 왔다고 했다. 그는 카페 직원의 도움을 받아 키오스크에서 음료를 주문했다. 왜 비서가 없는지 묻자 돈만 드는데 무슨 필요가 있냐고 반문했다. 일정, 이메일, SNS를 직접 관리한다.

이 이사장은 “능력과 식견이 모자라 여기서 그쳐야 하겠다”며 정치를 그만뒀다. 16년간의 재야 지도자, 12년간의 정치인 인생의 마침표였다. 그만두고 후회한 적은 없는지 묻자 정치인으로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정치라는 게 아무리 성공한들, 시대가 당면한 과제를 모두 해결한다는 건 힘들어요. 우리처럼 전쟁을 겪었거나, 전쟁을 겪고 나서 분단체제를 오래 유지하는 나라는 더욱 그렇죠. 자기가 원하던 정치의 미래가 충분히 달성됐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봐요.”

이 이사장은 자유언론실천재단, 동아시아평화회의에서 시민운동을 한다. 정치 원로와 함께하는 시민단체다. 이홍구 전 총리, 김원기 전 국회의장과 함께 일한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시민운동 뒤편에서 쫓아다님. 몰두를 사양하려고 해도 천성 탓에 끌려들어가는 통에 후회막급임’ 이라는 문구가 있다. 지금까지 했던 언론개혁운동, 평화운동이 뒷걸음질 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민운동에 매진한다고 했다.

이 이사장의 정치 인생은 언론계에서 시작됐다. 그는 KBS, 한국일보, 중앙일보를 거쳐 1968년 동아일보 기자가 됐다. 소심한 성격 탓에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란 어렵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고인이 된 송건호 전 한겨레신문 회장, 천관우 전 동아일보 주필과 함께 일했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는 최고의 언론사였다. 전 신문을 합친 부수보다 동아일보 부수가 많았다”고 했다. 이어서 학교 다니면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기자들이 모여 결의를 다져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고 대량 해직을 당했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언론인으로서의 원칙적인 입장을 지켜야 한다고 봤어요. 그게 잘못되면 정치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고. 그때는 언론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는 이런 식의 사명감도 있었어요. 지금은 뭐 언론이 장사꾼이 되어서 지사적 사명감 같은 건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네요.”

문영희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 위원(전 한겨레신문 이사·동아일보 9기 기자)은 한반도 평화와 정의구현을 위해 평생을 바친 선구자라고 이 위원장을 평가했다. 두 사람은 동아일보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함께했다.

“그는 영어(囹圄)의 몸이었을 당시, 검찰의 박종철 군 사망사건 수사발표가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외부로 알려 큰 파문을 일으키는 동기를 만들었다. 이는 결국 6월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정치인으로도 탁월했지만 언론인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

이 이사장은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참여한 한겨레신문에 합류하지 않고 재야 민주화운동을 선택했다. 1991년에는 당시 민주당(일명 꼬마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후 통합민주당 부총재, 한나라당 부총재, 열린우리당 당의장을 역임했다. 야권(평화민주당·민주당)통합에 일조했고, 한나라당 개혁세력인 ‘독수리 5형제’에 동참했다. 여야를 떠나 개혁에 앞장섰다.

주영진 SBS 앵커는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는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다”며 “민주주의를 향한 이부영의 꿈은 아직도 미완성”이라고 평가했다. 주 앵커는 정치부 기자로서 1998년부터 이부영 이사장을 취재했다.

주 앵커에게 이 이사장은 보통 취재원이 아니었다. “고 김근태 전 의장, 고 제정구 의원과 함께 70년대 대한민국 재야단체를 이끌어온 용기 있는 분이다. 이런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아서 존경과 신뢰, 믿음을 갖고 취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사동 술집에서의 일을 언급했다.

“옆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이 이 이사장에게 정치 똑바로 하라고 얘기했을 때 전혀 노여워하지 않고 부족한 게 많은데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걸 봤을 때 이 이사장은 겸손하고 국민의 생각을 많이 들으려고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사장은 30년 정치인생 동안 네 가지 법안(국가보안법, 개헌, 선거법, 한일협정) 개정을 꾸준히 주장했다. 그는 2012년 출판한 자서전에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로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지 못한 일을 꼽았다.

“2004년에 열린우리당 대표였던 나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은 걷어내자고 합의를 했어요. 그때 법이 바뀌었다면 이후에 많은 사람이 희생당할 일은 없었을 거야. 그런데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을 한 번에 폐지하겠다고 했다가 한 점도 바꾸질 못했어요. 이제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이나 되니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나설 수 있지요. 그런데 2004년의 일이 또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많이 나왔어요. 결과는 그때와 비슷할 거예요. 국가보안법의 경우 독소조항은 개정하고, 법안은 유지하되 오용되지 않도록. 관리해가면 되는 거지. 정치적으로 악용할 구실만 안 주면 돼.”

정치인으로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로는 김일성 조문을 꼽았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그는 국가 차원에서 조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유감을 표하는 데 그쳤다.

“조문하라는 권고는 대한민국에서 굉장히 하기 힘든 일이었어요. 그러나 그 뒤의 역사의 전개 과정을 보면 그 얘기는 잘한 거야. 조문 사절을 보내거나 조의를 표하고, 뒤에 북에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든 김일성 주석처럼 남북정상회담을 또 하도록 방침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식의 의지표명을 정부가 했더라면 남북관계를 푸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을 거야.”

그는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보수 언론은 내가 김일성을 존경해서 저런 얘길 했으니까 국회의원 사퇴하라고 그랬는데, 한 달쯤 지난 다음, 조문 문제를 제일 먼저 들고 나와서 비난했던 신문사 사장이 저녁을 먹자고 연락이 와서는 정중하게 사과를 하더라고. 언론사 사주가 정중하게 사과를 한 것은 정말 큰 사건이거든. 그걸 내가 공개적으로 아무한테도 말을 안 했어.”

정치인 생활은 마감했지만 언론개혁을 향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동아투위에서 활동하는 이유다. 그에게 한국 언론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묻자 언론의 공개 기업화를 거론했다.

“지금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야만적인 탄압을 받는 건 없어요. 오히려 언론사가 많아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생긴 상업주의적인 왜곡이야말로 기자들이 당면한 중요한 문제죠. 언론도 공개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공공재니까요. 자본시장 또는 일반 독자, 청취자로부터 감시를 받을 수 있어야 해요. 사회로부터 감시를 받고 투명하게 운영하고 범죄를 저지르면 처벌받고. 이런 얘길 자꾸 내가 하고 그러니까 언론이 싫어해요.”

인터뷰가 끝나자 이 이사장은 <스토리오브서울>을 운영하는 윤세영저널리즘스쿨에 관심을 보였다. SBS가 어떻게 지원하는지, 몇 년간 지속됐는지, 스쿨 출신 언론인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었다. 언론인을 꿈꾸는 학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요새는 언론이 사기업이라 이익을 내야 한다면서 언론의 기준에 맞출 수는 없다는 변명을 한다. 시대가 변하고 다원화되었다고 해도, 우리가 생각했던 언론은 변치 않아야 한다. 조그만 발전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이어나가는 언론인이 많이 나와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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