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전 환경부 장관(65)을 5월에 세 번 만났다. 옷차림이 항상 같았다. 회색 재킷, 베이지색 바지, 검은 운동화, 외출용 바람막이. 까맣게 탄 피부에 깡마른 체형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대구에서 8회 출마했다. 1995년 구청장 선거부터 2020년 제21대 총선. 첫 선거에서 남구청장에 당선돼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에는 계속 낙선했다. 1등은 미래통합당 계열이었다. 이 전 장관은 때로는 더불어민주당 계열로, 때로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대구에서 1985년 이후로 총선에서 이긴 민주당 계열의 정치인은 제20대 김부겸 전 의원이 유일하다. 제12대 총선에서 신도환 후보가 당선되고 31년 만이었다. 신 전 의원 역시 중선거구제에서 2위를 했다. 통합당 계열이 아니면 대구에서 당선되기는 그만큼 어렵다.

“선거를 한 번 떨어질 때마다, 사업으로 치면 부도나는 거랑 마찬가지라예.” 2002년 대구시장 선거부터 이 전 장관을 도운 팽용일 선거상황실장(54)의 말이다. 낙선은 그만큼 무거운 짐이다. 대구에서 민주당 출마자는 그 무게를 짊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대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나서는 후보들이 있다. 올해 총선에는 12개 선거구에서 모두 출마했다. 4선의 현역 의원도, 42세의 정치 신인도 있었다. 전원 낙선했다. 이 전 장관도.

▲ 대구 남구청장 시절의 이재용 전 장관(출처=MBC)

“왜 한국당 공천을 안 받고 민주당 받으셨어요.” 2018년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차우미 역사문화특별위원장(54)이 선거사무소를 구하는 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궁금했다. 민주당 대구시당원은 왜 대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했을까 대구 유권자는 왜 이들을 뽑지 않았을까.

취재팀은 5월 6일부터 6월 16일까지 취재원 33명을 만났다. 출마자, 시의원, 구의원, 사무처장, 시당 원로 등 민주당원뿐만 아니라 통합당 정치인, 시민, 대구에 연고가 없는 외부인, 전문가.

팽 실장은 총선 나흘 전의 전화를 떠올렸다. “마, 때려치와라(때려치워라).” 조금 뒤 만나려던 친구였다. “와(왜)?” “할 말 없다. 나와서 술이나 묵자.”

진보가 석권하면 대구의 자존심을 잃는다는 바람이 불었다. 팽 실장의 지인도 그걸 느끼고 전화를 걸었다. 노무현재단의 유시민 이사장이 4월 10일 ‘범진보 180석’ 발언을 한 직후였다.

그쯤부터 이 전 장관이 시장을 들어갔다 나오면 명함이 바닥에 떨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떨어진 명함을) 안 주워야 사람들이 한 번씩 지나가면서 보고 그러지”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비슷한 일은 1995년 선거부터 겪었다. 올해는 조금 달라서 ‘신기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분위기가 급변하기 전까지는 흐름이 좋다고 느꼈다.

코로나19가 확산하자 선거운동 삼아서 소독약을 뿌리고 다녔다. 두 번째부터는 “여기 좀 해 달라” “저기 좀 해 달라”는 유권자가 많았다. 명함만 돌리던 때보다 소통이 된다고 느꼈다.

후보를 알아보는 젊은이가 많았다. 평상복을 입고 운동하면 학생들이 얼굴만 보고 “어, 저 사람 그 사람인데”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사진 한 번 찍을까요?” “찍어주세요.” 명함을 주면 시선을 피하던 다른 선거 때와는 달랐다. 이 전 장관은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미래통합당 곽상도 후보가 득표율 67%로 당선됐고 이재용 후보는 31%로 낙선했다.

팽 실장은 “여태 본 후보 모습 중에서 가장 열심히 했다”고 평가했다. 기자가 많이 아쉽겠다고 위로하자 팽 실장은 “지금까지도 회복이 안 된다”고 대답했다.

“내가 이런 데 본인(이 후보)은 더 그럴 거다.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엄청난 (괴로움이 있다.) 물론 강골이니까 버텨내시지만 본인은 많이 힘들 거다.”

민주당 대구 중남구의 진호만 부위원장(67)은 1987년에 경부선 열차를 탔다. 품에는 ‘민족자족(民族自足)’이란 붓글씨가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교동 자택에서 “진 동지 대구시당 만들어지거든 현판을 붙이라”며 건넨 문구였다.

졸다가 일어났더니 차장이 근처를 서성였다. 진 부위원장은 차장을 경찰로 오인했다. 열차가 경북 청도를 지나는 중이었다. 외숙모댁으로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옆에 있던 통학생들이 기차가 가는 방향으로 뛰어내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몸을 던졌다. 바람이 철길 쪽으로 불었다. 몸이 기차 쪽으로 휩쓸렸지만 경사진 둑길이라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 때부터 민주당원이었다. 정치활동은 197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서 한영애 씨의 소개로 동교동에서 만나면서 시작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6·29선언이 나오고 직선제 개헌이 되자 정당으로 옮겼다.

▲ 1991년 6월 20일 광역의원선거 개표방송(출처=KBS)

“87년 당시는 선거가 전쟁이었다.” 진 부위원장은 선거 당시에 김대중 후보의 선거운동원이 호신용 죽창을 들고 다녔다고 했다.

잠시 한눈을 팔면 김 후보 포스터를 실은 차가 박살났다. 벽보를 붙이는 일은 밤에만 가능했다. 김영삼 후보 지지자가 선거사무실에 화염병을 들고 들이닥친 일도 있다. 그때 유세차 한 대가 불에 탔다.

동사무소는 선거인 명부를 열람하지 못하게 했다. 운동원이 보여 달라고 하자 경찰이 연행했다. 석방하라고 진 부위원장이 찾아갔더니 남대구경찰서가 그마저 억류했다. “잡아 여!(집어넣어)”라고 말한 경무관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한다.
 
노태우 김영삼 후보가 광주에서 계란을 맞는 장면이 TV에 생중계되자 지역감정이 극심해졌다. 김대중 후보가 대구 두류공원에 왔을 때는 “(김영삼 지지자들이) 생난리를 쥑있다(피웠다)”고 진 부위원장은 말했다.

대학생이던 대구 시민 이창원 씨(56)도 현장에 있었다. “돌을 던지고 욕을 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연설하던 김대중 선생의 한복이 처연하게 기억된다.”

진 부위원장은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91년, 1995년 대구 중구에서 신민주연합당(평민당의 후신) 시의원 후보로 나왔지만 낙선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1년 선거까지는 경찰서 등 곳곳에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이 파견됐다. 대구 민주당에도 요원이 있었다. 안기부 장학생이라고 불렀다. 이들을 통한 사찰과 조작이 많았다.

예를 들어 전라도에서 주유하는데 대구 번호판이 보이면 내리게 해서 ‘김대중 만세’를 시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역감정이 강해지면 김대중 후보가 대구에서 불리했다.

진 부위원장은 1995년 낙선하자 얼굴의 흉터, 고졸 학력, 경제적 여건 등 자신의 한계를 의식해 더 이상 출마하지 않았다. 시당 활동은 꾸준히 했다. 그동안 형제와 소원해지고 친구를 많이 잃었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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