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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리 집이 무너진다면…포항 지진, 그 뒤 3년 ①

기사승인 2021.01.17  18:5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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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영저널리즘스쿨 1기인 김윤정 백승연 양수민 이준엽 씨가 제3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수상작 <어느 날 우리 집이 무너진다면>은 2017년 11월 15일 발생한 포항 지진 이후의 3년을 다뤘다. 심사위원회는 “기존 보도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사건 그 후의 이면들을 좇았다. 주민이나 단체 간의 이견과 충돌·불협화음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보여줌으로써 지진 피해 이후 트라우마와 갈등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진흥회의 동의를 받아 수상작을 게재한다. 스토리오브서울 양식에 맞추면서 표현을 일부 고쳤다. <편집자 주>

1부. 지진의 깊이 - 집과 트라우마

2019년 7월, 서울 서대문구의 세브란스병원. 송창용 씨(43)는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어머니 김상자 씨(당시 75세)가 악성 뇌종양인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의사에 따르면 남은 시간이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이었다.

어머니는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동아들로 살아온 송 씨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마지막에 의사에게 물었다. 병이 유전적인 문제로 발현됐는지, 아니면 최근 몇 년간의 스트레스로 생긴 건지. 의사는 후자라고 대답했다.

김 씨가 20개월째 시달린 일이 있었다. 2017년 11월 15일 경북 포항의 규모 5.4 지진. 그날부터 흥해체육관의 대피소에서 텐트 생활을 했다. 그가 살던 한미장관맨션 아파트 주민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물이 새고 외벽이 갈라져 살 수 없는 집이라 생각해서다.

포항시는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주민 155명은 피해등급을 높여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김 씨는 언론 인터뷰에 활발히 응하고 행사에서 앞장서 소리를 치는 등 전면에 나섰다.

주민들은 2019년 6월 27일, 1심에서 패소했다. 그 뒤로 김 씨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오른쪽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기 시작해 여러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2개월의 항암치료 후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다가 2020년 2월 11일 별세했다.

송 씨는 패소 당일 어머니와의 통화를 기억한다. 속이 상해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고 했다.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자 힘이 빠지는 게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병원 모시고 가기 2주 전부터 ‘용아, 내가 자다가 자꾸 헛소리를 한단다. 옆에서 막 깨운다.’ 그런 얘기도 하셨어요.”

지진 전에 김 씨는 건강한 편이었다. 지병은 당뇨나 고혈압 정도. 대피소에서 함께 지낸 주민들도 그를 기운 넘치는 모습으로 기억한다.

한미장관맨션비상대책위원회 대표였던 김홍제 씨(61)는 “(포항)시장하고 내가 언쟁을 한 적 있다. 목마르겠다 싶으니까 할머니가 젊은 경호원들 제지를 뚫고 나한테 물을 떠 갖다줬다. 노가다를 오래 하셔서 힘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진 충격을 피하지는 못했다. 신순옥 씨(69)는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다. 시장 오면 맨날 시장 멱살 쥐고 싸웠다”고 회상했다. 김홍제 씨는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서 에어컨 쪽에 괴한이 들어왔다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기억했다.

▲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김상자 씨(왼쪽). 투병 중에 며느리 손을 꼭 잡았다.

‘김상자 포항 지진’이라고 검색하면 생전 영상이 여럿 나온다. 2018년 MBC 뉴스에서 그는 “다리가 아파서 통증이 와서 잠을 못 잔다. 여기 와서 2개월 만에 그 병이 생겼다”고 인터뷰했다.

신순옥 씨와 김홍제 씨는 김상자 씨의 죽음이 지진과 연관돼 있다고 믿는다. 김홍제 씨는 “법원이 우리 손을 들어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6월에 패소하면서 실망을 많이 했다. 거기서도 충격을 받지 않았겠나. 마지막 희망이 꺼져버려서”라고 말했다.

송창용 씨도 마찬가지다. “준비할 시간 없이 돌아가셨는데 자꾸 지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적 피해는 눈으로 보이지만 정신적 피해는 눈에 안 보이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송 씨는 세브란스병원을 갔다. 지진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영향이 있었다는 소견서를 써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주치의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조심스레 거절했다.

송 씨도 강하게 요구하기는 어려웠다.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의학적으로 규명하기 곤란하단 점을 알아서다. “물론 76살 어르신이 얼마나 오래 더 사셨겠습니까. 그래도 지진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결과는 아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지진이 자연적이지 않았으니까….”

‘포항 지진의 진상조사 및 피해구제 등을 위한 특별법’(포항지진피해구제법)에 따라 주민은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다. 입증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법의 잣대로는 어머니 피해가 지진 때문임을 증명하기 어렵다고 송 씨는 생각한다.

“주치의께서 소견서라도 그렇게 (써 주셨으면 나았을 텐데)…시한부 판정받을 때(지진과 관련이 있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제 처도 옆에 있었거든요.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그걸 증명을 할 수 없어 답답합니다.”

송 씨는 접수할지 말지 고민 중이다. “괜히 오해가 될 것 같다. 모친 돌아가신 걸로 어떻게 해서든…요즘 포항 지진 기사에 댓글을 보면 그렇다. 어떻게 보상 한 건 받아내려고 한다고.”

어디에라도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은 크다. 방송사에 전화를 걸고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변이 없었다.

“얘기를 들어주는 상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 주장을 어떻게 관철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사람도 있었겠구나, 입장을 좀 바꿔 생각해 볼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송 씨는 인터뷰를 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스토리오브서울 취재팀에게 거듭 말했다.

2020년 11월 15일은 포항 지진 3주년이었다. 이제 4년 차로 접어들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지켜볼 일이 여전히 남았다.

피해구제법에 따른 피해보상 절차는 2020년 9월 21일 시작됐다. 12월 23일 기준으로 1만 8607건이 접수됐다. 포항시가 선정한 업체가 실사하기 시작했다.

피해는 당사자가 입증해야 한다. 구제금 한도는 1억 2000만 원이다. 금액이 넘어가면 정부와 포항시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한다. 납득할 결과가 나올지는 포항지진피해구제심의위원회의 심사 결과를 지켜봐야 알 수 있다. 시행령 개정으로 재심 신청이 가능하다.

포항지진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은 2021년 6월에 끝난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반년 정도가 남았다. 관련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검찰도 위원회의 조사결과를 지켜보는 쪽이다.

지진은 지열발전소 운영으로 촉발된 인재지만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 누가 책임자인지 뚜렷하지 않다. 정부가 피해구제에 나섰지만, 구상권을 누구에게 청구해야 하는지, 구상권을 청구할지도 확실치 않다.

피해지원과 진상규명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 나아가 피해가 생긴 포항시, 특히 흥해 지역이 지진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해 부흥할지 아직은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아직 깊다. 지진으로 삶이 완전히 변한 사람들은 이전의 안락한 집을 그리워한다.

“참, 과거로 되돌리고 원래 살던 집에 사는 게 진짜 최고죠.” (대피소 거주자 김종덕 씨)

“우리가 잘 살지는 못해도 쪼매난 아파트에…(중략) 거기 살기 편하고 시장 가깝고 병원 가깝고 교통 좋고. 서울 사람들 한 평 값도 안 되잖아요. 국민연금 좀 타고 그냥저냥 사는데 괜찮았어요…(중략) 지열발전소 지어서 지진이 일어나게 만들어 놨으니까 지금 이 나이에 집도 없이 셋방살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LH 임대아파트 이주민 신순옥 씨)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던 집은 어떻게 해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지진이 가져가 버렸다.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무너진 영상을 보면 물리적 피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의 삶과 마음에, 포항이라는 공동체에 남긴 상흔은 언뜻 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김상자 씨 외에도 40~50명이 흥해실내체육관에서 2년가량 살았다. 절반 정도가 포항시 제안에 따라 2019년 겨울 LH 임대주택으로 이주했다. 남은 20~25명이 대피소에서 3년째 생활한다.

대피소에는 시에서 파견돼 출입을 관리하는 공무원이 있다. 그에 따르면 날마다 조금씩 바뀌어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30명 즈음이 대피소에서 지낸다고 한다. 체육관에서 잠까지 자는 사람은 하루 평균 12명. 70대 이상 고령이 3~4명, 나머지는 40~60대로 추정된다.

대부분은 한미장관맨션 주민이다. 지금도 대피소에서 지내는 김종덕 씨는 체육관에서 3명 정도 외에는 대부분 한미장관맨션 주민이라고 예상했다. 

▲ 2020년 12월 흥해체육관(왼쪽). 메모는 대피소에서 지낸 날짜를 보여준다.

생활은 녹록지 않다. 정사각형의 1.5평 텐트가 개인에게 배정됐다. 키가 크면 다리가 텐트 밖으로 삐져나온다. 화재 우려로 개별 난방도구는 허락되지 않는다. 대형 온풍기 4개가 난방시설의 전부. 공기는 따뜻해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막을 수 없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주민은 여러 방법을 고안했다. 두꺼운 침낭을 구비하거나 페트병에 뜨거운 물을 채워 죽부인처럼 안고 잔다. 김홍제 씨는 제일 필요했던 게 핫팩이라고 했다. 바닥의 냉기를 막기 위해 핫팩을 최대한 깔고 잤기에 사용량이 많았다.

겨울에는 건조하므로 빨래를 적셔 텐트 입구나 안에 널어놓지만 체육관이 커서 금방 마른다. 박화진 씨(54)는 USB를 연결해 쓰는 소형 가습기를 샀다. 김종덕 씨는 화분을 체육관 곳곳에 두고 기른다. 그는 인터뷰 도중 “건조해서 금방 마른다”며 직접 말린 모과를 선물했다.

지금까지 대피소에 머무르는 주민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집보다는 대피소가 낫다고 판단했다. 2019년 LH 임대주택으로 이주할 기회도 마다했다.

임대아파트 계약기간이 2년이어서 장래가 불안하고, 한 달 10만 원이 넘는 관리비와 공과금을 부담하기 어려워서다. 임대주택은 일터와 멀기도 하고 버스노선이 최근에야 생겼을 정도로 승용차 없이 오가기 어려운 곳에 있다.

취재팀이 대피소 내부를 확인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코로나 19 확산 우려로 외부인 출입을 제한한다. 박화진 씨도 확진자가 나올까 걱정했다. “코로나 한 사람만 나와도 폐쇄해야 하는데, 폐쇄되면 갈 데가 어디 있어요. 다 부서진 집에 살아야 하는데.”

대피소 생활은 취재원, 그리고 입구에서 만난 주민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야 했다. 현관에 주민이 앉아 있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접촉을 시도했다. 주민은 손사래를 쳤다. 취재팀이 찾아간 날은 크리스마스였지만 성탄 분위기를 느낄 구석은 없었다. 고요하고 추웠다.

50명가량이 집보다 대피소가 낫다고 판단해 2년간 체육관 생활을 했다. 4년차로 접어든 사람도 20명 남짓이다. 집이 어떤 상태이길래 그토록 불안해할까?

취재팀은 12월 24일과 25일에 한미장관맨션을 둘러봤다. 소파(小破)에서 나중에 완파로 판정이 뒤집힌 대웅파크맨션 1차도 찾았다. 대웅파크맨션에서는 모든 세대가 퇴거했다. 한미장관맨션은 상당수 주민이 집에 산다.

이재민은 ‘지진에도 길이 있다’고 말한다. 진원지와 가까운 순서대로 피해가 크지 않고, 지진 경로에 걸치냐에 따라 정도가 다르다. 택시기사 조규성 씨(57)는 이렇게 말했다. “양덕동에 OO아파트가 있거든요? 102동인가 103동인가는 거기로 지나가서 작살났고, 105동 109동 이런 데는 또 괜찮아요.”

한미장관맨션도 건물마다 피해가 다르다. 전체 4동 중에 가동과 나동의 피해가 제일 컸다. 라동은 외벽이 손상됐다. 가동은 정밀안전진단에서 E등급, 나동과 다동은 D등급을 받았다. 체육관의 주민도 가동과 나동이 제일 많다. 두 동을 합치면 130세대. 이제는 절반만 남았다. 나머지는 임대주택으로 이주하거나 체육관에서 살거나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가동과 나동은 외벽 곳곳이 심하게 갈라졌다. 군데군데 외벽이 떨어져 나가 시멘트 벽돌이 드러났다. 떨어진 외벽 조각에 맞지 않도록 철골에 그물망을 설치했다. 철골 구조물이 공사 현장에 온 듯한 인상을 줬다.

아파트 1층 창문에는 방범을 위해 설치한 쇠창살이 있다. 어떤 곳은 외벽이 심하게 부서져 손으로 방범 창살을 뜯어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 한미장관맨션에 설치한 철골과 그물망(위). 가동 아파트 외벽에는 금이 갔다.

라동은 외벽을 시멘트로 메웠다. 비가 새지 않도록 2020년 장마 직전에 시공했다. 한미장관맨션 비상대책위원회 최경희 대표(48)는 인부들에게 물었다. “아저씨, 이렇게 하면 괜찮아요?” 인부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우리도 이렇게 하긴 처음입니다. 해달라는데 우짜는교.”

아파트 전체 수리에는 한계가 있다. 안전진단을 하면서 전문가들은 금이 간 쓰레기 배출구를 빨리 철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수억 원이 들어서 하지 못했다.

아파트 관리소장의 안내를 받아 가동을 돌아봤다. 그 역시 한미장관맨션 나동 주민이다. 비가 새고 균열이 몇 군데 있지만 참고 산다고 말했다.

굵직한 균열이 많았다. 특히 모서리나 창틀에 금이 많이 갔다. 건물 외벽과 연결된 부분의 균열이 많아 비바람이 샐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천장이 뜯긴 집도 있었다. 관리소장은 비가 새서 젖은 천장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고 주장했다.

비바람이 새는 점은 주민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피해다. 지진 다음 해인 2018년 태풍 콩레이가 왔을 때, 많은 집에 비가 샜다. 가동 1층 주민인 김종덕 씨 집에서는 집중호우 당시 바닥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문지방을 잘라 내고 쓰레받기로 퍼냈다.

대피소에 머무르는 박화진 씨 집은 비 때문에 천장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살지 않지만 앵커를 사서 받쳐 놓았다.

비가 새는데도 왜 수리하지 않느냐고 묻자 관리소장은 “또 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대답했다. 자기 집을 수리해도 윗집, 아랫집이 수리하지 않으면 헛일이라고 했다. 송창용 씨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어머니 집을 수리했다. 비가 샌다는 아랫집의 민원 때문이었다.

주민이 사는 가구도 방문했다. 상태가 양호한 편인 라동. 20년째 거주한다는 정광락 씨(56)는 사진을 보여주며 하소연했다. 지진 후에 따로 수리한 부분은 없다고 했다. 빈집보다는 양호했지만 균열이 곳곳에 있었다. 외벽과 연결된 창틀에는 실금이 보였다. 정 씨는 금이 조금씩 커진다고 했다.

수리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정 씨는 “집 전체에 금이 갔는데 우리만 수리한다고 집이 안 무너지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전에 들리지 않던 소리가 지진 후에 크게 들린다고 했다. 윗층의 코 고는 소리나 TV 소리가 커서 집이 울리는 기분이라고 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주민에게서 들었다. 박화진 씨 집에서는 옆집의 화장실 소리가 들린다. 이중벽을 사이에 두고 양쪽 화장실이 붙어있는데 금이 가면서 소리가 샌다. 옆집이 임대아파트로 이주해서 이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윤귀순 씨(88) 집도 비슷했다. 곳곳에 작은 실금이 있었다. 외벽과 연결된 창문 모서리에 금이 갔다. 비가 많이 새서 벽이 곰팡이로 얼룩덜룩했다. 윤 씨는 고무 대야를 여러 개 두고 산다. 비가 오면 곳곳에 받쳐 놓는다. 큰 대야에서조차 물이 넘칠 정도라고 했다.

심장병을 앓는 윤 씨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막 아파서 터질라 해.” 그는 거동이 불편해 딸의 부축 없이는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한다. 비가 올 때마다 대야를 받치기엔 버거울 터였다.

▲ 박화진 씨의 집은 빗물 때문에 천장이 내려앉았다(위). 윤귀순 씨 집은 창문 주변에 생긴 틈으로 물이 샌다.

한미장관맨션에는 이사하기 힘든 주민이 많다. 윤귀순 씨 같은 고령자는 대피소 생활을 꺼린다. 우는 어린아이가 있거나 반려동물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어서 남기도 했다. 취재팀은 뇌경색 반신마비로 이사가 힘들다고 말하는 주민을 만났다.

가동과 나동에는 불이 켜진 집이 별로 없었다. “여기 밤 되면 좀 죽은 집 같아. 컴컴해 막.” 정광락 씨의 말이다.

완파 판정이 나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은 대웅파크맨션 1차 아파트도 비슷했다. 빈집이라 쓰레기가 쌓였는데 금이 간 부분은 한미장관맨션보다 적어 보였다.

대웅파크맨션 1차를 방문한 날, 칼바람이 불었다. 모래 먼지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철문이 간혹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가 열렸다. 그럴 때마다 아파트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빈집의 달력은 지진이 일어난 2017년 11월에 멈춰 있었다. 한미장관맨션의 빈집과 마찬가지로.

멀쩡해 보이는 아파트도 땅속 기둥을 보면 금이 가 있을지 모른다. 한미장관맨션 맞은편의 필로티 구조 빌라를 볼 때도, 두터운 강철 보강물이 유독 눈에 띄었다.

피해보상 문제가 해결되고, 책임소재가 확실히 규명·처벌된다면. 대피소나 방재 대책이 더 꼼꼼해진다면. 이런 바람이 모두 이뤄져도 지진은 남는다. 피해자의 마음속에 끈질기게 있다.

김홍제 씨는 2017년 11월 15일 지진 당일이 어제같이 생생하다. “아침 겸 점심을 먹으려고 한창 식탁에 밥 차려놓고 먹는데 다다다다 흔들리더라고.”

얼마 안 가 멈춰서 그런가 보다 했던 흔들림은 돌이켜보니 강력한 지진 전조였다. “다 먹고 (그릇을) 개수대에 놓고 한발 두발 떼는데 갑자기 몸이 윙 들리고요. 갑자기 와라라라 흔들리는데요. (두 팔을 벌리며) 거짓말 안 보태고 벽이 이만큼 흔들리더라고요.”

최저기온이 (영상) 4.8도까지 떨어진 날. 위에는 티셔츠 하나, 발에는 슬리퍼를 겨우 걸친 상태로 김 씨는 집을 뛰쳐나왔다. 겉옷은 입을 생각도 못 했다.

문이 열리지 않아 몇 번을 밀어젖혔다. 흔들리는 난간이 유일한 동아줄. 본능적으로 탈출했다. “2층에서 뛰어 내려왔는데, 어떻게 내려왔는지 정신없어요.”

정신을 차리니 밖이었다. “우리 아파트 갈라진 거 있죠. 흔들릴 때는 안 갈라졌습니다.” 김 씨는 계속 말했다. “지진이 딱 멈추니까 정적이 흐르고, 등 뒤에서 와좌좌좍 갈라지는 소리가 나요. 소름이 돋더라고요.”

그는 아파트를 멍하니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밥상을 차리고 먹던 곳. 뒤늦게 휴대폰을 봤더니 부재중 전화가 40통이 넘었다.

▲ 신순옥 씨가 먹는 약. 불안증치료제, 신경안정제, 수면제다.

모든 피해자가 그날을 선명히 기억했다. 아직도 약을 먹어야 겨우 서너 시간 잔다는 신순옥 씨, 지진 나고 한 달 동안은 옷을 입고 문 앞에서 잔 최호연 씨, 꿈에서마저 지진을 겪은 최경희 씨. 피해자는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일상은 지진 이전과 딴판이었다. 여행 갈 때 타는 고속버스, 여가를 즐기는 영화관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됐다. 고속버스에서 잠든 신순옥 씨는 울렁이는 진동을 느낄 때마다 황급히 주위를 살핀다.

김홍제 씨는 한미장관맨션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맡으며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냈다.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영화관을 3년 동안 피했다. 어둡고, 소리가 울려 무섭고, 집중도 안 됐다. 두려움 없이 지나던 지하철 환기구조차 남다르게 다가왔다.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도 놀라 움츠러들었다.

최호연 씨는 트라우마 피해를 이야기하며 ‘공포’를 거듭 언급했다. 지진이 나기 전에는 보디빌딩을 할 정도로 건강한 편이었다.

“숨도 안찬데 허리는 굽고, 식은땀이 나고, 사람 많은 데 가는 게 공포였어요.” 최 씨는 이동하기가 힘겨웠다. 2년 가까이 일을 쉬었다. “병원까지 차로 10분밖에 안 돼요. 그런데 차가 반대편에서 나를 덮칠 것 같고, 숨이 차고…” 전형적인 공황장애. 약을 처방받았는데 성분이 독해서 먹으면 일주일은 비틀거렸다.

한미장관맨션에 지금도 사는 윤귀순 씨는 지진 이후 협심증이 악화됐다. 불안증에 시달리다가 스텐트 시술을 받았다. 지진 전에는 심장약만 먹었지만 이제는 신경안정제까지 먹는다. 약을 먹지 않으면 헛것이 보이고 수시로 주변이 흔들리는 기분이다.

피해가 비교적 덜한 곳에 살던 주민도 당시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택시기사 조규성 씨는 지진 이야기를 하자 여진 때의 상황을 생생히 풀어놓았다.

“주차장이 넓잖아요. 거기 딱 세우는데 진짜 큰 비단구렁이가 스멀스멀 가는 것처럼 여진이 꿀렁꿀렁하대요. 그게 더 트라우마가 생기는 거야. 발바닥 밑에서 비단뱀 15~20m 되는 비단뱀이 지나가는 것처럼.”

송창용 씨는 여진 때 공포를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 후룸라이드나 자이로드롭 같은 거 타면 순간적으로 팍 떨어지면 장기가 위로 올라오는 것 같잖아요. 거짓말 보태서 한 3~4m 건물이 자이로드롭처럼 확 빠집니다. 그 전에 굉음이 나고요. 나고 나서 흔듭니다. (포항에서 지진 겪은 이후에) 대구 이사 가서도 옆집에서 문 닫는 소리나 저희 층고가 낮아서, 3층이라서 차 소리가 우웅 거리면 진동이 오잖아요? 그럼 놀라요.”

포항 시민의 공통점인지 모른다. 많은 사람에게 지진은 평생 잊지 못할 일생일대의 일이었다. 지진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듯이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방식 역시 다양했다. 정신과에서 약을 지어 먹는가 하면, 상담소에서 눈물을 쏟았다.

일부는 트라우마를 인정하지 않거나 상담을 거부했다. 트라우마를 정신 질환으로 보고 회피하는 문화가 피해자를 더 구석으로 내몰았다. 최호연 씨는 직장에 들킬까 봐 다른 사람을 통해 약을 짓는 피해자도 봤다고 했다.

트라우마 피해자를 향한 오해 섞인 말들이 아팠다. 한참을 망설이다 응한 인터뷰에서 피해를 고백하는 최 씨를 두고 날 선 댓글이 달렸다. ‘남자가 뭐 그거 갖고 그래?’ ‘돈 더 받으려고 하는 거 아니냐.’

그럼에도 최 씨는 트라우마 피해 공론화를 멈출 생각이 없다. “공론화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테니까요.” 그는 아직 망설이는 피해자에게 당부한다. “사람들이 함부로 이야기하는 거, 저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해요.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본인 치유가 안 되거든요.”

트라우마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진 후 정부와 포항시가 연계해 심리 상담 및 치료 인력 6500여 명을 투입해 포항재해심리지원단을 운영했고 전국 최초로 트라우마센터가 들어섰다. 센터는 수용인원이 적어 마감 행렬이 이어진다.

그러나 제도적 지원만으로 트라우마를 모두 해소할 수 없었다. 신순옥 씨의 LH 임대주택에는 먹어야 할 약이 가득했다. 최호연 씨도 하루에 네 번 약을 챙겨 먹는다. 최경희 씨는 인터뷰에서 눈물을 쏟았다.

 

 

 

 

김윤정·백승연·양수민·이준엽 기자 storyofseoul20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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