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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교수의 세계 여행기 ㉒ 임진왜란 도발의 진원지 나고야 성터

기사승인 2021.01.24  20: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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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합이 노려본 바다의 안개로구나 (太閤が 睨みし海の 霞かな)’

서애 류성룡 연구팀이 팬데믹 직전인 2019년 11월에 사가현의 나고야(名護屋) 성터를 방문했을 때 발견한 비석의 단가이다. 여기서 태합이란 일본말로 타이코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를 칭한다. 도요토미가 노려본 나고야성 앞바다는 한반도와 어떤 역사적 관계가 있을까?

▲ 나고야 성터의 비석(왼쪽)과 하이쿠 비석

바로 이곳 나고야성은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1592년 1월 5일 병력 동원령을 내린 장소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쓰라린 역사의 현장이다. 나고야 성터는 17만㎡로 당시로는 도요토미의 본성인 오사카성 다음가는 규모였다.

1591년 가을에 공사가 시작돼 5개월 만에 완성했다. 천수각은 6층 높이로 해발 89m였다. 도요토미는 나고야성 혼마루에 기거하며 조선 침공의 총지휘를 했다. 나고야 성터와 주변 3㎞ 이내에 23곳의 진영터가 남아있다. 일본은 이곳을 특별사적지로 보호하고 있다.

성내에는 유게키마루(遊擊丸)라고, 강화사절로 이곳을 찾은 명나라 심유경이 숙박했던 곳도 있다. 도요토미 사후 일본의 실권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진영터는 북쪽 나고야보육원 근처에 위치한다.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

도요토미의 동원령으로 조선 침략군의 대본영이었던 이곳 히젠 나고야성 일대에 병력 28만 6000명이 몰렸다고 한다. 도요토미는 이를 16군으로 나누어 제1군에서 7군까지 조선 정벌에 투입한다. 이 병력이 13만 7000명이다. 선발대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군으로 1만 9000명이다.

이들은 1592년 3월 13일 나고야에서 이키시마(壱岐島)를 경유해 쓰시마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한 달 동안 전열을 정비한 후 4월 13일 부산으로 출항했다. 10시간 노를 저어서 해가 질 때 부산 절영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다음 날 정발이 지켰던 부산포를 함락하고 송상현이 분투했던 동래성 전투에서 승리한다.

▲ 일본군의 해상 침입 경로 (김태훈, <이순신의 두 얼굴>, 46쪽 참조)

고니시가 이끄는 선발대는 이후 파죽지세로 밀양 대구 상주 문경 충주까지 올라가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던 신립의 8000 기마병을 격파한다. 한양에는 5월 2일에 무혈 입성한다. 4월 14일 첫 전투 이후 20일 만에 한양을 정복하고 개전 두 달 후에 평양까지 점거한다.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이끄는 제2군은 2만 3000명으로 울산 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잠시 합류했다가 5월 3일 남대문에 도달한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끈 제3군은 1만 1000명으로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평양성에서 1군과 함께 잠시 주둔하다가 황해도로 이동한다.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제7군은 3만 병력으로 규모가 가장 크다. 전투에는 소극적이었다.

조명 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운 일본군은 고니시의 제1군과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 그리고 황해도 연안성 전투에서 이정암에게 격퇴당한 제3군 정도이다. 이들 5만 군사가 조선의 국토를 유린했다.

고니시와 가토는 왜란 이전부터 경쟁상대로 도요토미 사후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과 동군으로 맞선다. 가토는 도쿠가와를 도왔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의 견제를 받아 본인의 영지를 뺏기고 간토 지방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이게 약이 됐다. 간토 지방의 황무지를 개간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조선 침략에 나서지 않았고, 힘을 비축해 에도막부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나고야 성터 구석구석을 다니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국내 대학의 캠퍼스보다 작은 규모의 나고야 성터와 130여 곳의 진영에 전국 다이묘가 보낸 군사 28만 6000명이 실제로 다 주둔할 수 있었을까. 한국이나 일본이나 사료(史料)에서는 실제보다 병력을 부풀리기 위해 큰 숫자를 사용하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의 인구는 1200만 명에서 14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은 일본 인구의 반 정도로 추산됐다. 중국은 1억 2000만 명 내외였다고 추산한다.

도요토미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조선을 침략했으나 인구수에서 10배나 많은 중국을 넘보기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다. 조선군과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제1군의 고니시가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제1군이 평양에서 후퇴해 한양에서 남은 병력을 점검하니 6600명으로 한 해 동안에 약 65%의 병력을 잃었다.

고니시는 평양 점거 후 심유경과 강화협상에 적극적이었다. 명나라 협상에서 도요토미는 한강 이남 4도를 요구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정유재란을 다시 일으켰다.

그는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포함해 규슈의 2배가 넘는 한강 이남 영토를 전리품으로 얻으려 했다. 재침할 때 특별히 전라지역을 공격했다. 이순신의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를 이해했다고 봐야 한다.

▲ 위에서부터 거북선, 도요토미 목상, 나고야성 박물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을 석권하고 왜 곧바로 조선 침략에 나섰을까. 그는 정말로 중국 천하를 도모할 의사가 있었을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분로쿠의 역’이라 부른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허망에 진실로 동조했을까. 일본인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생각할까.

도요토미에 대한 현대 일본인의 평가는 두 가지로 나뉜다. 비천한 출신에서 불굴의 의지로 타이코에 오른 최고 권력자다. 에도막부 시대를 연 도쿠가와와 전국시대의 승자로 떠올랐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함께 일본 중세의 세 영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NHK의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에선 도요토미가 ‘노망이 들어서’ 조선 정벌에 나섰다고 격하한다. 7년 전쟁은 조선과 명, 일본에 각각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바꿨다.

▲ 나고야 성터에서 바라본 이키 쓰시마 국정공원

나고야 성터에서 나오기 전 아오키 겟토(靑木月斗)라는 시인이 대륙 정벌에 나섰던 도요토미를 생각하며 지은 단가 비석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태합이 노려본 바다의 안개로구나 (太閤が 睨みし海の 霞かな).’

일본어에서 하(霞)는 봄 안개를 나타낸다. 단가란 다섯, 일곱, 다섯 음(音) 형식의 짧은 시로 일본에선 하이쿠(俳句)라고 불린다. 위 하이쿠를 히라가나로 읊으면 ‘타이코우가 / 니라미시 우미노 / 가스미카나’로 5·7·5의 17음으로 구성된다.

저널리즘의 이해라는 과목에서 기사는 간단, 명료, 분명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첫 문단에 전체 기사 작성의 2분의 1이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간을 사용하라고 강조한다. 이런 측면에서 하이쿠는 복잡한 현실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의 정곡을 찌르는 기사의 야마(山·やま)를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 여길 수 있다.

 

 

 

 

심재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storyofseoul20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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