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4월 11일 오전, 서울지하철 3호선 옥수역 일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옥수역 근처에는 주한 미얀마 대사관의 무관부가 있다. 용산구 한남동의 미얀마 대사관과 별도로 군부 업무를 담당한다. 미얀마 민주주의 네트워크가 2월 초부터 근처에서 집회를 한다.

현장에서 만난 미얀마인은 아무도 익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이 나온 사진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했다. 위험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쩌탁(31)은 “미얀마에서는 아이들도 총 맞고 죽는다. 우리가 무서울 건 없다”고 말했다.

집회 30분 전, 열댓 명의 진행자가 현수막을 설치했다. 거리에는 미얀마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피켓과 현지 사진을 놓았다.

▲ 미얀마 대사관의 무관부 앞에서 열린 집회

청년들은 차도를 향해 일렬횡대로 섰다. 방역지침에 따라 9명이 조를 이뤄 30분마다 교대했다. 이날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집회를 했다.

“미얀마 군사 쿠데타 반대한다! (반대한다!)”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쳤다. 미얀마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사용했다. 구호와 구호 사이에 노래가 흘러나올 때는 군부 쿠데타와 아웅산 수치 국가 고문의 구금에 항의한다는 의미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무관부 건물을 응시했다.

참가자는 2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다. 파주에서 일하는 네이완엉(29)은 일요일마다 참석한다. 그는 집에서 아침 8시쯤 출발했다.

“(재한 미얀마인들이) 여기 오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다. 단지 시간이 안 돼서 못 온다는 사실은 우리도 다 안다. 나처럼 여유 있는 사람이 몇 번 더 오는 거다.” 그는 같은 날 중국 대사관 앞에서의 집회에도 간다고 말했다.

무관부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네이완엉은 “(관계자가) 한 번도 나와서 우리를 본 적이 없다”며 “건물 내부에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전에는 박창진 정의당 부대표가 현장을 찾았다. 그는 “미얀마의 군부는 마치 제가 저항했던 갑질 권력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오후에 현장을 찾은 국민의힘 지성호 의원은 “많은 구호 중 ‘미얀마 국민이 이 싸움에서 지면 북한이 된다’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했다.

같은 시각, 서울 중구 명동의 중국 대사관 앞에서도 집회가 열렸다. 미얀마 군부를 지원하는 중국을 규탄하기 위해서다.

주최 측에 따르면 참여 인원은 50여 명. 여기서도 9명이 조를 이뤄 집회를 이어갔다. 현장의 피켓에는 ‘독재정권 돕지 말고 미얀마 국민을 도와달라’,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중국은 미얀마 국민의 의지와는 달리 반군과 여전히 접촉하고 있다. 인권침해를 겪은 미얀마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 자신의 이익만 보고 인류의 가치를 모르는 중국 정부의 부끄러운 행동을 비난하기 위해 오늘 집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이 반복해서 외친 내용이다.

▲ 중국 대사관 앞에서의 집회

집회는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도 열렸다. 반응이 없는데도 집회를 계속하는 이유를 묻자, 현장에서 만난 쑤미얏은 “응답이 없더라도 우리가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 자체를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5년째 사는 미야카비야초(25)는 “미얀마 시민도 5.18 광주 민주 항쟁처럼 군부에 저항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며 “관련 없는 시민까지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점에서 두 나라는 비슷한 모습이 많다”고 설명했다.

직장인 녜잉뻬이쏭(29)은 얼마 전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며 놀랐다. 영화 속 광주의 모습과 미얀마의 현재 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특히 택시 운전사가 차로 계엄군의 총격을 막고 다친 청년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미얀마에서도 버스 기사들이 시위 현장 곳곳에 버스를 주차해 시민을 향한 군부의 총격을 막아주고 있다.”

부산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킨녜잉신(28)은 “한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니 (미얀마와) 비슷한 점이 많아 롤모델로 삼게 됐다”며 “80년대 민주화 운동부터 2017년 촛불혁명까지, 민주주의를 쟁취한 한국을 본받아 미얀마도 평화를 되찾도록 열심히 노력한다”고 밝혔다.

녜잉뻬이쏭은 미얀마에서 시위가 벌어지면 가족에게 연락한다. 19살인 남동생은 늘 방패 하나만 들고 선봉에 선다. 민간인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난달 27일, 남동생은 시위를 하다 군인에게 쫓겼다. 빈 건물로 숨어들어 5~6시간 숨어있다가 집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녜잉뻬이쏭이 가족을 못 본 지 1년 반이 넘었다. 그는 “엄마는 통화할 때마다 매번 운다. (현지) 상황이 심각해 남동생이 걱정되긴 하지만 시위가 실패하면 가족을 영영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미얀마인은 하나같이 죄책감을 느낀다. 현지에서는 목숨을 걸고 투쟁에 나서는데 자신들은 편하게 시위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녜잉뻬이쏭은 “(재한 미얀마인들은) 안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국 사람의 응원을 받으면서 시위를 하는데 미얀마에서는 매일 사람이 죽어 나가니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밝혔다.
 
부상자의 사진과 영상을 매일 보면서 트라우마가 생겼다. 원래 녜잉뻬이쏭은 공포영화나 잔인한 영상은 잘 보지 못한다. 얼마 전에는 스테이크에 소스를 뿌리는 사진을 보다 깜짝 놀랐다. 소스를 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대학원에 다니는 킨디다쩌(37)는 얼마 전부터 가족과 연락하기가 조심스럽다. 지난달 엄마가 걱정돼 국제 전화를 걸었는데 나중에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다. “우리가 통화하는 내용을 몰래 들은 것 같다.” 다른 미얀마인 역시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페이스북을 통한 연락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시민의 핸드폰을 불시 검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휴대전화의 앱을 들여다보고 쿠데타를 반대하는 내용을 발견하면 즉시 연행한다.

일주일에 한 번, 비행기가 뜨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 해외의 미얀마인을 통해 현지 소식이 전 세계에 퍼지자 군부가 ‘쿠데타를 반대하는 해외 교민을 잡아가겠다’고 발표했다. 킨디다쩌는 “미얀마로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해 친구와 가족이 모두 반대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은 해외에서 할 일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우리끼리 모이면 감정적인 이야기도 하지만, 어떻게 현지 사람을 도울 수 있을지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단체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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