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서 시민이 죽는다. 누구는 분노를 느끼며 거리로 나가고 누구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집에 남는다. 그들은 슬픔과 무력감을 느끼며 하루를 보낸다. 거리로 나간 이들의 목소리는 뉴스에 나오지만 집에 남은 이들의 이야기는 듣기 힘들었다.

스토리오브서울 취재팀은 지인을 통해 미얀마 청년 8명을 소개받았다. SNS로 55일 동안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은 인터뷰를 하는데 통화가 갑자기 끊겼다. 친척 집에 다녀오겠다던 취재원은 2주 동안 연락이 두절됐다. 그들은 매일 총소리를 듣는다고 말했다.

미얀마 만달레이 중심부에 사는 또우다(23)는 4월 17일 트위터에서 영상을 봤다. 총에 맞은 남자가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며 텅 빈 도로를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비명과 함께 총성이 다섯 차례 들렸다. 또우다의 친구 띤(23)이 사는 모곡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다.

띤은 남자가 총에 맞는 순간을 주방 창문 너머로 목격했다고 또우다에게 말했다. 남자는 곧 끌려갔다. 군인들은 띤의 집 마당에서 피 묻은 손을 씻고 2시간 30분이 지난 후에 돌아갔다.

또우다는 “군인들은 총을 쏴 사람들을 죽인다. 그런 일이 우리 집 바로 앞, 옆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현지 상황을 설명했다.

▲ 총에 맞아 기어가는 시민의 모습(출처=트위터 ‘2021 Revolution Tweets’)

또우다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전국의 미얀마 대학이 쿠데타 이후 휴교했다. 5개월 전만 해도 또우다는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대학생이었다. 지금은 ‘키보드 파이터’로 활동한다.

뗏(20)은 만달레이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다. 매일 6시간씩 게시물 100개 이상을 트위터에 올린다. 그는 용돈을 모아 반군부 진영인 국민통합정부(NUG)와 난민을 지원하는 단체에 1만 5000 짜트(약 1만 원)을 기부했다.

아마라푸라에 사는 대학생 찬(25)은 오전 7시에 일어나 하루 7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 그는 “쉬고 있으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미얀마인에게 미안함을 느낀다”며 “하루 대부분을 키보드 파이터로 사는 이유”라고 말했다.

지난해 2월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얀마로 돌아온 푸우(25)는 시위대를 위해 군인의 위치 정보를 트위터로 공유하고 잔혹 행위를 담은 사진과 영상을 해외 언론사에 보낸다. 푸우는 시위대에 합류하지 못해 죄책감을 느낀다.

거리에는 시민이 보이지 않는다. 또우다는 밖에 나가더라도 어두워지기 전에 가능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고 서두른다. 길에서 시민이 칼에 찔린 사건이 9건이나 되기 때문이다.

군인과 경찰은 시민을 붙잡아 돈을 요구하고 물건을 빼앗는다. 인터뷰에 응한 취재원은 군경을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했다.

군경은 휴대폰 사진첩, 페이스북, 채팅 메시지를 확인한다. 쿠데타를 반대하는 게시물을 올리거나 아웅산 수치 국가 고문의 사진, 시위에 참여한 흔적이 있으면 바로 체포한다.

▲ 미얀마 시내가 텅 비었다. (또우다 제공)

찬은 외출할 때면 낡은 휴대폰을 들고 나간다. 삼성이나 애플처럼 유명 브랜드의 기기를 보면 군경이 빼앗기 때문이다. 찬은 “그들이 내 물건을 가져가고 돈을 요구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들이 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인(22)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지만 이제는 밖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 집을 나서는 순간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낀다. 아인은 밖에 나가더라도 군인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화려하게 꾸미지 않는다.

집 안도 안전하지 않다. 군인들은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시위대를 끌고 간다. 시위자 정보를 경찰과 군인에게 알려주는 ‘정보원(military informant)’이 동네마다 있다.

그들은 시위대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시민의 집 주소, 전화번호, SNS 계정을 알아낸다. 찾아간 집에 시위자가 없으면 군경은 시위자의 가족을 연행한다.

푸우는 “군인들이 집 안의 돈, 핸드폰, 보석을 다 훔쳐 간다”고 했다. 또우다는 “우리는 집에서조차 안전하지 않다”며 “건강한 사람도 군인에게 끌려가면 다음 날 아침 시체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찬은 군부와의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수민족 무당단체인 카친독립군(KIA)과 카렌민족연합(KNU)은 시위자와 같은 편에서 군부와 싸운다. 미래에는 더 많은 전투가 일어나고 심지어 내전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찬은 내전을 피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비상용 가방을 준비했다. 페이스북에는 비상용 가방에 무엇을 넣어야 하는지, 전쟁이 터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게시물이 쏟아진다.

푸우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지만 식량을 사거나 장소를 옮기지는 않았다. 식량을 많이 사놓으면 상품 가격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 군인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시위대를 쫓는 모습(또우다 제공)

군인 30명이 퓨(23)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쳤다. 집 안을 수색하고 퓨와 가족의 휴대폰 통화 목록, 메신저, 페이스북 계정을 확인했다. 프리랜서 기자인 아버지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이미 2월에 집을 나갔다.

군은 쿠데타 이후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미얀마 형법 505a조는 군경 직무 수행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가짜 뉴스를 퍼뜨리거나 공포를 유발하면 최대 3년 형에 처하도록 했다.

퓨의 아버지 역시 형법 505a조에 따라 선동죄로 기소됐다. 군부의 눈을 피해 도피 중이라 퓨조차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가끔 퓨는 모르는 번호로 아버지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는다. 단지 안전하냐고만 묻는다. 항상 우리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힘내라고 말한다. 군부의 쿠데타가 끝나면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다.”

푸우는 “눈앞에서 사람을 잡아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이 너무 답답하고 괴롭다. 국민이 매일 당하고만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못 보겠다”고 말했다.

찬은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뭘 했길래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이걸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제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우릴 도와주지 않는가? 이런 질문이 매일 밤 머릿속에 맴돈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쿠데타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밤마다 냄비를 20~30분 두드린다. 총소리가 울리면 불을 꺼야 한다. 집에 불이 켜지면 군인이 창문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을 쏜다.

저녁을 8시에 먹던 까우(19)는 총소리가 들리자 불을 모두 껐다. 근처 가게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 모두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우리 집까지 오는 건 아니겠지?” 여동생이 까우에게 속삭였다. 이후 두 발의 총성이 더 들렸다.

“군인이 총을 들고 집에 들어오면 싸우려고 했다. 정말 무서웠다. 그날 밤 아침이 될 때까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그들에게 죽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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