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 민주당 의원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났다. 7월 13일, 서울 중구의 한국프레스센터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한국기자협회가 주최한 대선 예비후보 초청 토론회가 있던 날이다.

그는 남색 양복 차림이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캐주얼복장이던 모습과 달랐다. 보좌관 없이 혼자였다. 기자가 말을 걸었더니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싸움을 잘해서 보통 혼자 다녀요.”

김동훈 기협 회장은 토론회에서 박 의원을 이렇게 소개했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의원.” 토론회 내내,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밝혔다. 모든 질문에 준비가 된 듯했다.

▲ 박용진 의원(왼쪽에서 네 번째)이 한국기자협회 토론회에 참석했다. (출처=박용진 의원실)

‘평범한 강북 3대 바로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20대 총선 당시, 박 의원의 선거 공보물 문구다. 기협 토론회에서도 그는 평범한 가정환경을 언급했다.

“저는 어릴 때 위인전을 좋아했어요. 근데 제가 절망했던 게 뭐냐면 역사의 인물을 보면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 않아요. 집안도 뼈대 있는 가문이고... 그런데 저희 집안은 정말 평범해요. 우리 아버지한테 죄송한데 이 족보도 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향은 전북 장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 강북구로 이사했다. 경찰관이던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받았다. 학창 시절 내내 강북구에 살았다. 화계초등학교, 신일중과 신일고를 졸업했다. 이곳이 지역구가 됐다.

그에게는 두 명의 ‘인생 스승’이 있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과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다. 이 이사장은 신일고 2학년 때 담임이고, 권 전 대표는 진보정당 운동을 함께한 정치적 아버지 같은 존재다. 매년 설날에 세배하러 찾아간다. 결혼식의 공동주례자이기도 하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전태일다리에서 만났다. 박 의원은 대선 출마 의사를 두 스승에게 비쳤다. “전태일 정신을 실천하는 대통령이 되라”는 덕담을 들었다. 

▲ 왼쪽부터 권영길 전 대표, 이수호 이사장, 박용진 의원(출처=박용진 의원 페이스북)

박 의원은 신일고 2학년 때 학생회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이 이사장은 “용진이는 굉장히 부지런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인 성격이었죠. 자리만 적당히 지키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학생회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았던 것 같아요. 학생 의견을 모아서 학교에 건의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입시에 전념해야 하는 고 3 때, 박 의원은 교내 시위를 주도했다. 이 이사장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사태로 해직되었을 때다. 1000명 넘는 학생이 교문 앞에 모였다. 교사들이 막았다.

고등학생 박용진은 한계를 느꼈다. 자서전에서 당시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의 계획은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모두가 나를 쳐다봤지만 나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주저앉아 울었다.”

고교 시절, 박 의원은 기자를 꿈꿨다. 사회를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1990년 성균관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이 이사장의 권유였다.

대학에 가서는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994년, 성균관대 총학생회장과 서울 북부지구 총학생회연합 의장으로 활동했다. 권 전 대표는 당시 박 의원을 이렇게 기억했다.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으로 (서울지하철 파업 당시) 누구보다도 노학(노동자-학생) 연대에 열성적이었어요. 차별 없는 사회, 노동자가 소외받지 않고 신명나게 일할 사회에 대한 갈망이 학생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 대학생 시절(출처=박용진 의원 블로그)

서울지하철 노조와 부산지하철 노조, 철도기관사노조의 연대 파업을 지원하다가 잡혀갔다. 이후 노동운동을 하다가 두 번 더 구속된다. 모두 2년 6개월을 철창 안에서 보냈다.

24세. 남보다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갔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전까지는 격렬한 투쟁이 세상을 바꿀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근데 군대 가서 나를 들여다보고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어린 고참에게 사회 문제를 설명하고 책 한 권을 권하면 사람이 바뀌자 박 의원은 깨달았다. 사람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얻는 일이 혁명이라는 사실을. 정당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 군대에서의 모습(출처=박용진 의원 페이스북)

대학을 졸업하고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권 전 대표는 당시 박 의원과 동지 관계였다고 말했다. “노학연대를 주도한 박용진이 1997년 노동자 대통령 후보 진영에 결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죠.”
 
권 전 대표는 대선에서 패배했다. 이후 박 의원은 2년간 민주노동당 건설에 동참한다. 사람이 부족해서 일당백 역할을 해야 했다. 박 의원은 조직부장, 기획부장, 대변인, 대표 비서를 맡았다. 이런 그를 권 전 대표는 헌신과 열정의 화신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활동비도 못 주는 상황이었거든요. 박용진도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해결하면서 운동에 뛰어들었죠.” 박 의원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청춘을 갈아 넣고 있으면서도 행복했다. 세상을 바꾸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각오가 모든 시름을 잊게 했다.”

민주노동당 후보로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만 28세였다. ‘노동자 서민이 나서야 세상이 바뀐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선거구는 서울 강북을. 득표율 13.3%, 3위였다.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두 달 준비한 결과였다.

▲ 박용진 의원의 역대 선거 포스터. 민주노동당 기호 5번으로 시작해 진보신당 기호 6번, 더불어민주당 기호 2번과 1번으로 출마했다.

박 의원은 뜨거웠던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은 젊은 사람의 도전이 보고 싶은 거다.”

그는 2010년에 과감한 전환을 시도한다. 청춘을 바친 진보정당을 탈당한다. 민주노동당과 그 뒤를 이은 진보신당 당내 정파 싸움에 회의감을 느꼈다. 진보정당의 한계를 절감했다.

박 의원은 2011년 겨울, 경남 하동의 악양에 책 한 권을 들고 갔다. '정치가 우선한다.' 인생 책이다. “이 책을 보고 진보정당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진보신당에서) 나왔죠.”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책 앞부분에 메모로 남겼다. 기자 앞에서 메모 일부를 읽었다.

▲ 왼쪽은 책을 읽기 전, 오른쪽은 책을 읽고 남긴 메모

“이 책의 내용과 내 고민이 맞닿아 있다. (…) 지난 20년 제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더 이상 자랑이 아니다. (…)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정치인은 무능이다.”

“정치가 제공하는 가장 소중한 것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 책의 결론이라 할 수 있겠다. (중략) 1밀리미터 민중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이제 타협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중략) 앞으로 주어진 20년은 다른 방식, 다른 삶으로 살아가야 되겠다.”

진보정당이라는 틀만 고집하기보다 진보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지를 먼저 생각하는 일이 옳다고 판단했다. 이후 혁신과 통합, 시민통합당을 거쳐 민주통합당에 합류했다. 민주당 대변인 경력은 정치 인생의 밑거름이 됐다. 2년 동안 당 대표 9명과 함께했다.

“제가 대변인 5년 해봤거든요. 민주노동당 3년, 민주당 2년. 저한테 좋은 공부의 시간이었죠. 민주당이라는 공당의 대변인으로서 정확하게 정부 여당에 비판할 거 비판하고, 세상 문제에 대해 정확한 입장 내고…. 자기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죠.”

국회에는 20대에 입성했다. 16년 전, 패배를 맛본 강북을에서였다. 자서전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정말 기뻤다. 흔히 말하는 계파도 없이, 낙하산 깜짝 발탁이 아닌 지역구에서 맨주먹으로 뛰고 구르면서 일궈낸 결과였기 때문에 가슴이 벅찼다.”

서울 강북구의회 서승목 의원은 20대 국회에서 박 의원의 정책특별보좌관으로 일했다.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좌관이 가져온 결과물에 대해 1% 좀 더 나아진 걸 원하시죠. 국회에서 지금도 가장 힘든 보좌관이라고 들었어요. 워낙 워커홀릭이라….”

박 의원과 12년째 함께 하는 박상필 수석보좌관은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회의원실은 다 힘들다. 그중에 우리가 좀 더 힘든 의원실인 것 같기는 하다. 의원의 아이디어가 많고 새로운 기획을 많이 말하기 때문이다. 또 뭔가를 하면 꼭 끝을 보고, 반드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해서 힘들다.”

박 의원은 자신을 “손에 잡히는 공정과 성과를 이뤄낸 정치인”이라고 소개한다. 유치원 3법, 재벌 개혁, 현대자동차 결함 리콜, 공매도 제도 개선. 재선 의원으로서 내세우는 개혁 성과다. 

유치원 3법은 ‘박용진 3법’으로도 불린다. 박 의원은 2018년 국정감사에서 7개 시도교육청 감사에 적발된 전국 비리 사립유치원 명단을 공개했다. 이후 사립유치원의 정부 지원금 부정 사용을 막기 위한 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작년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최순영 경기여성연대 대표(전 민주노동당 의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박 의원을 “소신 있는 의원”으로 기억했다.

최 대표는 2018년에 경기도교육청 시민감사관으로 활동하며 사립유치원 비리를 발견했다. 언론에 제보했지만 공론화가 쉽지 않았다. “(박 의원이 경기도교육청에) 자료 요청을 했길래 아이구 잘됐다 하면서 내가 찾아갔지. 박 의원 정도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박 의원에게 경고했다. 사립유치원의 압력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박 의원은 걱정 말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박 의원이 굳건히 견뎌줘서 너무 고맙죠. 아무리 우리가 감사를 해도 국회의원이 그걸 받아주지 않으면 어려웠죠.”

▲ 기자와 인터뷰하는 박용진 의원

박 의원은 1971년생, 90학번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주자 중에서 가장 젊다. 대선 출마 선언식에서도 “행복국가를 만드는 용기 있는 젊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발표문을 직접 쓴다. 보좌진은 검토만 한다.

대선캠프 출범식은 네이버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를 통해 열었다. 10~20대가 주로 이용하는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서 걸그룹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을 춘 영상도 화제가 됐다. “스무 살 틱톡 선배들이 하자고 하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거예요.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지.” 

정치인으로서 원칙을 물었다. 주저 없이 여덟 글자를 말했다. “내로남불 역지사지. 초선의원한테도 다 얘기했었어요. 내로남불 하지 말고, 역지사지 해봐라. 그러면 쓸데없이 남 욕하지 않는다.”

박 의원 측근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소신이었다. 기자는 7월 12일, 줌(Zoom)을 통한 ‘박용진 대국민 화상회의’에 참여했다. 소신 행보의 원동력을 물었다.

“저도 쫄아요. 겁 많아요. 저 A형 남자예요. 소심하기도 하고 주저하기도 하고 걱정도 많아요.  근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걸 보면 화가 나요. 국민 보기엔 세다, 겁도 없나보다 하지만 실제론 겁 많아요. 속으로 엄청 주판 튀기면서 살고 있고…. 우리 엄마가 제일 걱정해요. 너 어쩌려고 그러냐고. 하하하. 그래도 앞으로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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